* 아래의 글은 미하엘 벨커와 존 폴킹혼이 엮고 신준호 박사가 옮긴 [종말론에 관한 과학과 신학의 대화]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2년), 497-516쪽을 요약한 것이다. 수 년 전 세미나 시간에 요약 발제한 글인데, 발제할 때는 책으로 나오기 전 초벌 번역 상태여서 근거 쪽수를 댄 것이 지금 인쇄된 책과는 맞지 않아 없앴다. 벨커 교수의 글을 차분히 읽으면 정말 좋다.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조직신학자 미하엘 벨커(M. Welker)는 종말론에 대한 과학과 신학 사이의 대화 -적어도 기독교 신학에 있어서- 에서 가장 민감한 문제를 “부활”로 본다. 왜냐하면 과학적 시각에서 부활은 과학적이지 않으며 합리적이지 않기 때문에 반현실(counter-reality)이고 초현실(hyper-reality)이다. 하지만 벨커는 부활은 과학이 요구하는 합리성의 조건을 충족한다고 보고, 과학의 입장에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실성을 맞세운다. 그는 부활의 현실성과 그 현실성에 참여를 주장하며, 나아가 부활의 현실 이해로부터 영원한 생명의 본성이 무엇인지를 논구한다.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는 경험
벨커는 유한한 삶의 종말론적 변형의 근거를 부활의 현실성에서 찾는다. 이를 위하여 그는 부활에 관계된 신약성서 본문을 살핀다. 이 고찰에서 그는 부활에 관한 성서의 증언들 -특히 부활현현 보도기사들- 이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나고 있음을 밝혀낸다. 이 두 가지 형태는 곧 부활체의 감촉성(palpability)과 부활체의 단순한 나타남(appearance)이다. 여기서 벨커는 부활의 모습 내지 형식을 분석해낸다. 벨커에 의하면 예수의 부활은 단순한 육체적 재생 내지 부활 이전으로의 환생이 아니다. 그러면 어떠한 근거에서 벨커는 부활을 단순한 육체적 재생으로 보지 않을까?

우선 벨커는 신약성서의 부활보도를 다음 세 가지로 구분한다. 빈무덤 전승, 부활의 증거들을 빛의 나타남과 연결하는 본문들, 그리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나타남을 그와 인격적 만남으로 서술하는 본문들. 벨커에 의하면 빈무덤 전승은 부활에 근거한 신앙창조엔 실패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빈무덤은 단지 부활 이전의 예수의 육체가 얼마동안 부재했다는 사실만을 강조하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는데, 오히려 예수의 부활을 선포하기 보다는 두려움에 휩싸이게 했기 때문이다. 이어서 벨커는 부활 현실성을 빛의 출현으로 보는 견해를 비판한다. 이러한 견해는 부활이 육체적 소생이라는 사고를 배제하지만, 예수와 인격적 관계가 모호하기 때문이다. 이제 벨커는 부활 성서본문에서 부활 현현과 그 부활 현현의 감촉성을 찾아낸다(발 만짐: 마 28:9, 빵을 주심: 눅 24:30, 상처 만짐: 눅 24:39, 생선 먹음: 눅 24:41ff), 도마 이야기:  요 20:27). 그에 의하면 이런 구절이 바로 성서의 관심인데, 곧 부활하신 예수와 부활절 이전 예수와의 관계 내지 정체성을 표현하려는 시도이다. 그는 이러한 시도의 가장 대표적인 예로서 누가복음 24장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얘기를 든다. 벨커는 이 이야기에서 부활체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잡아낸다. 구체적으로 그는 부활하신 예수가 두 제자와 육체적으로 함께 있으나, 그들이 예수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에서, 또한 예수를 알아보자 곧바로 사라짐에서, 부활이 육체적 재생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벨커는 부활을 지상적 삶으로의 소생이나 환생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성서 어느 곳에도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자 마자 환영했다는 표현이 없다고 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부활 이전과 이후의 연속성은 비자연적 방식이 짙은 연속성이다. 게다가 그는 예수가 사라지고 난 뒤, 두 제자의 반응 -“우리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눅 24:32)- 에서 이미 두 제자가 예수를 알아보기 이전에도 부활하신 자의 현재에 대한 느낌을 가졌다고 본다. 따라서 벨커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만날 때 부활 이전의 예수를 만나는 장면에서 부활 이전과 부활 이후의 연속성을 찾는다. 그런데 부활하신 분과 만난 자들의 경험은 환상이 아니라, 하나님 현현(theophany)으로 경험된다(도마의 고백 등). 그러면 구체적으로 이러한 하나님 현현 경험인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경험에서 무엇이 발생하는가?

정경적 기억으로서 그리스도에 관한 기억
벨커는 얀 아스만(J. Assmann)의 문화적 기억 이론에 기대어 부활하신 자의 현재의 방식을 설명한다. 아스만에 의하면 문화적 기억은 문화적 형성 능력을 지닌다. 그러므로 문화적 기억은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도덕적 공간 형성의 기억이다. 아스만은 “한 공동체의 의사소통하는 기억은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기억”이라고 했다. 문화적 기억은 변화에 저항하는 차가운 선택(아스만) 내지 차가운 사회(레비 스트로스)와 뜨거운 기억 내지 신화의 추진력(Mythomotoric)이라는 두 과정을 갖고 있다(뜨거운 역동화와 차가운 정체화). 아스만은 이러한 문화적 기억의 한 예로서 정경(canon)을 든다. 여기에서 벨커는 정경의 문화적 기억 작용을 살아있는 문화적 기억 곧 “정경적 기억”으로 명명한다. 그러면 벨커가 말하는 정경적 기억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벨커는 정경적 기억을 그리스도의 기억으로 이해한다. 그에 의하면 이 그리스도의 기억은 부활에 의하여 설립되고 제도화된, 그리고 성례전의 선포와 실행에 의하여 새롭게 되는 기억이다. 물론 살아있는 문화적 기억으로서의 그리스도 기억 또한 성서에서 조절과 자극의 두 축을 갖고 있다. 벨커에 의하면 정체성을 조절하는 기능은 공관복음서에서 예수의 삶, 선포,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한 보도에 나타난다. 또한 역동화시키는 기능은 요한복음, 사도행전, 계시록에서 드러난다. 이러한 그리스도에 관한 성서 진술의 원인이자 근거가 바로 그리스도이다. 벨커는 ‘그것들(그리스도에 대한 전망들, 역할들, 칭호들: 필자 주)은 -실질적으로- 그리스도의 삶, 그의 선포, 그의 죽음, 그리고 그의 부활에 의하여 생성된(generated)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만남에서 그리스도 기억이 점화된다(inflammability). 그리고 이러한 만남 안에서 정경적 기억은 역사적 예수를 언급함으로써 활동한다. 또한 성만찬에서 그리스도 기억은 성령을 통하여 반복적으로 그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러므로 벨커가 주장하는 정경적 기억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만남에서 정경적 기억은 점화되고, 그 점화된 기억은 갖가지 증언들로 구성된 역사적 예수(부활 이전의 예수)를 언급하며, 성만찬과 선포에서 공통의 기억과 경험을 형성하는 부활하신 분의 현재적 기억이다. 다시 말해서 정경적 기억은 회상, 경험, 그리고 기대를 형성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이 완전하게 현재하는 현실적인 능력을 지닌다. 여기에서 벨커는 한 걸음 더 나가서 우주의 파국을 피할 수 없는 유한한 인간에게 부활하신 그리스도 기억이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를 질문한다. 다시 말해서 문화적 기억의 사슬 그리고 신앙의 사랑하는 행위가 인상적이고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것들은 영원한 생명을 완전하게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리스도 기억의 기폭제요 내용 그 자체로서의 부활은 영원한 생명과 어떠한 관계인가?

부활하신 분의 생명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
벨커는 부활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영원한 생명과의 관계에서 고찰을 하는데, 우선 부활의 능력은 기억의 행위가 아니라, 성육신 안의 생명의 실체와 영광 자체로서 그리스도의 생명의 충만이다. 영원한 생명은 그리스도의 기억을 강렬하게 되도록 지시하고, 우리에게 참여하도록 한다. 그러므로 부활의 능력은 영원한 생명에 있다. 따라서 이 생명에의 참여가 기독교적 희망의 근거이다.
그런데 벨커에 의하면 성서에서 생명 즉, 구원에의 참여는 심판 안에서 드러난 구속에서 극적으로 드러난다(그는 구약성서에서 심판은 율법의 완성이다. 그런데 율법의 완성, 곧 율법의 본래 정신의 회복은 자비의 법의 실현이라고 본다. 그에 의하면 이점은 신약성서에서도 여전히 자비의 행위 안에 집중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확대해서 보면 세계 심판을 통한 영원한 생명 안으로의 변이(transition)이다. 그러므로 벨커는 영원한 생명에의 참여를 심판의 또 다른 생각이라고 한다. 즉 지상적 생명이 영원한 생명으로 이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상적 생명과 영원한 생명은 구분된다. 왜냐하면 심판은 현재 세계의 피조적-역사적 직물조직을 해체하고 변형시키기 때문이다. 영원한 생명의 이러한 두 가지 측면을 벨커는 “종말론적 보충(complementarity)”이라 지칭한다. 그러므로 영원한 생명은 지상적 세계에 포괄되어 있으나 초월한다. 왜냐하면 영원한 생명은 지상적 세계의 자연적, 문화적 삶의 과정들의 전달과 재생산의 형식들에 제한되거나 예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요약하면 벨커가 논증한 부활의 현실성은 역사적 예수의 인격을 배제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부활이 부활 이전의 예수로의 육체적 소생은 아니다. 그래서 부활은 연속성과 불연속을 지닌다. 그런데 부활의 현실성은 선포와 성만찬을 통해 역사적 기억의 차원을 지닌다. 이것은 살아있는 문화적 기억 내지 정경적 기억인데, 이 정경적 기억을 발화시키는 것이 바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이다. 그리고 정경적 기억 구성의 장은 역사적-문화적 패턴(현실)이다. 이러한 인격적 만남은 부활의 능력인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는 원동력이 된다. 그런데 부활이 육체적 소생이 아닌 것처럼, 영원한 생명은 지상적 생명과는 구분되나, 그렇다고 영원한 생명이 지상적 삶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이것을 벨커는 심판을 통한 구속을 통해 설명한다. 벨커는 세계의 심판은 역사적 과정 안에서 일어나지만, 세계의 모든 유한한 조건들과 역사의 모든 특수한 과정들을 초월하는 전체성 안에서 발생한다고 한다. 이러한 점에서부터 벨커는 영원한 생명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영원한 생명의 지상적 삶에서의 내재와 초월로 이해하고, “ …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 발견하는 영원한 생명은 그것의 예기(anticipation)를 이미 여기 지구 위에서 재촉한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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