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교다닐 때 판넨베르크의 글을 읽고 써 놓은 것인데,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판넨베르크는 창조와 진화, 창발적 진화와 계속적 창조 … 어떻게든 이 개념들이 따로 국밥이 아니라 뭔가 연관이 있다고 말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창조, 진화, 창발적 진화, 계속적 창조…. 이런 용어보다 내게 흥미로운 것은 신학자들이 우리 입의 “말”을 어떻게든 자신의 신학 사유에서 밀쳐내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어쨌든 이 글을 다시 읽으며 드는 생각은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이 창조 사역이지 않나’ 싶다.

1. 다윈은 기계적 진화론만을 얘기하지 않았다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W. Pannenberg)는 창조와 진화가 서로 맞서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진화에서 창발적인 계기를 발견하고, 창조에서 진화의 모습을 찾아낸다. 그가 발견한 진화에서의 창발적인 모습은 다윈의 기계적 진화론의 재해석인데, 찰스 고어가 편집한 [세상의 빛: 성육신 종교 연구 시리즈]를 주목한다. 이 책을 읽고 그는 진화가 결코 기계론적이 아니고 역사적이라고 한다. 판넨베르크에 의하면 초기 다윈주의는 진화과정 안에서 새로움의 출현이나 우연성의 역할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갖지 않았다고 한다.


2) 성서에는 창발적 진화가 있다

판넨베르크는 창조에서 진화의 모습을 찾아내는데, 땅에서 생명체를 창조한 것을 주목한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동식물을 직접 창조하시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인 땅으로 하여금 그것을 만들도록 유도하시고 계신다(창 1:12, 24). 피조물인 땅에서 동식물이 만들어진다는 것은 전혀 예측할 수도 없고 상상도 할 수 없는 새로운 일이다.  이 새로운 일을 판넨베르크는 이 땅과는 관계하시면서 새로움을 일으키시는 창조자의 사역이라고 본다.

3) 창발적 진화와 계속적 창조
이제 판넨베르크는 창조론에서든, 진화론에서든 우연적으로, 예측할 수 없이 일어나는 계기를 포착하는데, 이것을 그는 <창발적 진화>라고 한다. 이 개념으로써 그는 창조론과 진화론을 화해시키고 또한 합리적으로 결합시키려고 한다. 그에 의하면, 성서에서 발견되는 우연적이고 새로운 하나님의 사역은 하나님의 계속적 창조로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은 결코 이신론(Deism)의 하나님이 아니다. 오히려 성서의 하나님은 이 세상과 관계하고 계속적으로 창조하고 계신 분이다.

그는 이러한 하나님의 계속적 창조 사역을 성령의 사역과 연결시킨다. 창발적 진화의 개념에서 볼 때, 인간 생명은 창조 이후 그대로 방치되어 있거나 프로그램에 따라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생물학적 인간 출현에는 특색이 있다고 본다. 그에 의하면 인간 존재는 생물학적 차원을 뛰어넘어 창발적으로 진화하는데, 그것이 바로 문화적 진화이다. 이러한 차원으로의 창발적 진화에서 판넨베르크는 인간의 “언어”를 주목한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문화적인 역동성을 일으키는 것이다(자기 기관화 내지 조직화의 원리).

그렇다면 <창발적 진화>는 <계속적 창조>라 할 수 있을까? 창발적 진화와 창조는 상응한다. 왜냐하면 창발적 진화가 새로움의 출현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는 우리(인간) 세계에서 볼 때, 전혀 새로운 것의 출현이기 때문이다. 창발적 진화는 문화적인 차원에도 영향을 미친다. 판넨베르크는 문화가 형성되는 것은 인간 영의 자기 조직화를 통해 하나님의 직접적 창조사역 내지 하나님 의지가 개입해서 나타난다고 한다. 그러면 인간 영과 하나님의 영을 구분할 수 있을까? 그 경계선은 어디일까? 구분할 필요 조차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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