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를 본받느냐 본받지 않느냐

“그(=본회퍼)에게 예수는 강력한 지휘관이었다. 예수를 본받는 것이야말로 그가 이룰 수 있는 최고의 성취였으며, 타인에게 이르는 통로를 확보하는 길이었다. 그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쪽으로 교회의 방향을 돌렸으며, 그리스도를 본받느냐 본받지 않느냐로 교회를 평가했다. 이 시기에 그가 전개한 신학은 그리스도의 인품에 집중되었으며, 항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삼는 신학이었다.”

– 에버하르트 베트게 지음, 김순현 옮김, [디트리히 본회퍼], 복있는 사람 2006, 98쪽.

 

베를린에 본회퍼가 갇혀있던 테겔 형무소가 있다. 내가 베를린에 잠시 있을 때, 본회퍼의 무덤이 어디 있나 싶어서 지도를 뒤적이고, 서점에 들러 이 사람 저 사람이 쓴 본회퍼 전기를 찾아 그의 연보를 훑었다. 베를린 종합운동장 근처에 본회퍼 기념관이 있다는 것과 본회퍼의 유해는 하늘에 뿌려졌다는 것만 확인했다. 차일피일 미루다 끝내 본회퍼 기념관을 방문하지 않았던 것이 못내 아쉽다. 한국에 돌아와서 그의 일생을 다룬 소설 [진노의 잔]을 만지작만 대었는데, 반갑게 발견한 본회퍼 전기 번역서를 허겁지겁 읽는다.

 


이 책을 읽고 쓴 다른 두 글을 여기에 옮겨 싣는다.

그후 나는 현세에서 충만히 살 때에만 비로소 믿는 법을 배울 수 있음을 알았고, 지금도 그렇게 알고 있네. 성인이건, 회개한 죄인이건, 성직자건, 의인이건, 불의한 사람이건, 병든 사람이건, 건강한 사람이건 간에 제 스스로의 힘으로 무엇인가를 하겠다는 생각을 포기할 때, 나는 이것을 현세성이라고 부르네. 그것은 말하자면 과제와 문제, 성공과 실패, 경험과 우왕좌왕을 충만히 사는 것이네.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 품으로 뛰어들고, 이 세상에서 우리 자신의 고통이 아니라 하나님의 고통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겟세마네의 그리스도와 함께 깨어 있게 되는 것이네. 나는 그것이 신앙이고 회개라고 생각하네. 그럴 때에만 우리는 인간이 되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네(예레미야 45장을 참조하시게!). (194쪽)

 

베를린에 있던 테겔 육군 형무소에서 본회퍼는 친구 베트게에게 편지를 보낸다. 그는 미국에 있을 때, 프랑스 출신 어느 목사와 나눈 대화를 떠올린다. “살아가면서 무엇이 되고 싶은가?” 프랑스 목사는 성인이 되고 싶다고
했고, 본회퍼는 믿는 법을 배우고 싶다고 했다. 본회퍼는 믿는 법을 성스러운 생활과 같은 무엇인가를 하려고 시도하면서 배울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러한 생각 끝에 [그리스도를 본받아]란 책을 썼다. 베트게에게 편지를 보낼 즈음에 그는 자신의 생각이 위험한 것임을 알아차렸지만, 자기 입장을 그대로 지지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위에서 인용한 것처럼 현세에서 충만히 살 때에만 믿는 법을 배울 수 있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성스러운 삶을 살려고 애쓰는 것이 부질 없고, 이런 생활태도, 정신, 생각을 포기하는 것이 믿는 법을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길이라 하면서, 그는 또 성스러운 삶을 살려고 애쓰는 기본 노선을 포기할 수 없다고 한다. 아니면 아닌 것이지 본회퍼는 왜 이렇게 얘기할까.

본회퍼는 루터의 생각을 가장 올곧게 따른 사람이다. 빵이면 빵이지 거기에 예수님 몸도 함께 있으며, 포도주면 포도주일 뿐인데 거기에 예수님 피도 함께 있다는 말을 본회퍼는 삶에서 체득했다. 숨어계신 하나님과 드러난 하나님을 그는 삶에서 깨달았다. 모순처럼 보이는 본회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때 그는 아마 그리스도인의 현실을 살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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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하나님과 맺는 관계는 대단히 높고 전능하며 가장 뛰어난 존재와 종교적으로 맺는 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결코 참된 초월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맺는 관계는 타자를 위해 존재하고 예수의 존재에 참여하면서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다. 도달하기 어려운 무한한 과제가 아니라 그때그때 주어지는 이웃이 초월적인 것이다. 근동의 종교들에서 보듯이, 섬뜩하고 무질서하고 멀리 떨어져 있고 소름끼치는 짐승 모양의 신, 절대적인 것, 형이상학적인 것, 무한한 것 등의 개념으로 포장된 신이 아니라,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하나님이 초월적인 것이다! 인간 자체의 희랍적인 신인(神人) 형태가 아니라, 타자를 위한 인간으로 살다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이 초월적인 것이다!” (255쪽)

본회퍼는 그리스도는 무엇인가?에서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으로, 그리고 그리스도는 오늘 우리에게 누구인가? 로 옮겨간다. 그리스도에 관한 설명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대면하고 싶은데, 생생한 현실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고 싶은 것이리라. 그가 만난 그리스도는 타자를 위한 인간으로 살다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이시며, 그래서 초월적인 분이시다. 그를 본받는 삶, 그를 따르는 사람만 그를 만난다.

 

본회퍼는 교회도 새출발을 해야 한다고 한다. “교회가 새 출발을 하려면 전 재산을 궁핍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어야 한다. … 타인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 개념이 아니라 모범을 통해서 말해 주어야 한다. 교회에서 선포되는 말씀은 모범을 통해서만 무게와 힘을 얻을 수 있다”(같은 책, 256).

 

이 대목에서 어느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영생을 얻는 방법을 묻는 장면이 떠오른다.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넌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들은 그 사람이 근심하며 떠났다는 장면이 떠오른다. 하지만 그렇게 해야만 새출발 할 수 있다. 그렇게 해야만 예수를 따를 수 있다.

 

이 시대 오늘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꾸만 이런 근심을 하게 하신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차원 보다 더 복잡하게 얽힌 근심의 상황으로 우리를 내모신다. 그리고 거기에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렇게 우리와 함께 근심하고 고난당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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