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박태식 선생이 쓴 사도 바오로에 관한 개괄서이다.
이 책은 전반부를 바오로의 생애로, 후반부를 바오로의 사상으로 할애한다.
전반부는 바오로의 출생, 이름, 성격, 직업, 회심, 1,2,3차 선교여행, 체포, 죽음이 소개되어 있다.
후반부는 신학적 주제를 다루는데, 바오로의 수사학, 그리스도론, 인간론, 부활, 종말론, 신론, 교회론, 율법과 믿음, 구원론, 윤리를 설명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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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다가 아리송한 부분이 있어 저자에게 멜을 보냈다.

박 선생님께,

선생님이 타르수스의 바오로 89쪽에 스토아 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의 차이와 같은 점을 간략히 적으셨습니다.

“스토아 학파는 질서가 세상에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모습을 ‘지혜(소피아)’로 보았는데, 그 지혜는 금욕적이었다. 그에 비해 에피쿠로스 학파는 욕망을 최소화한 상태에서 누리는 행복을 최고의 미덕으로 보았다.”

이 구절에서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의 차이점은 어떤 것인지요?

스토아 학파도 지혜를 금욕하면서 추구하고, 에피쿠로스 학파도 욕망을 최소화 하면서 행복을 추구한다면, 금욕이나 욕망을 최소화하는 것은 같은 뜻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욕망을 최소화한 상태에서”를 에피쿠로스 학파가 쾌락을 이야기 하지만 마음의 동요에서 벗어난 쾌락(아타락시아)을 말한 것으로 읽으면 일면 이해되나, 그래도 스토아 학파를 설명한 부분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이해가 잘 안 됩니다.

책을 읽다 보니 이 부분에 물음표를 그려놓게 되어 이렇게 편지 띄웁니다.
선생님이 쓰신 나자렛 예수도 재밌게 읽었습니다.

박태식 선생님이 답을 주셨다.

 

제 글을 열심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스토아  학파가 금욕적, 에피크루스 학파는 쾌락적, 이라는 말들을 많이 합니다. 양자를 단순하게 비교하면 금욕이 쾌락을 가져올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가능할 수 있다는 사람도 혹가다가 있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금욕은 쾌락의 대상이 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금욕을 방편으로 쾌락을 맛볼 수는 있겠지요. 이를테면 다분히 자학적인 경향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스토아 학파에서는 금욕과 절제를 우주를 이끄는 원리로 본 것 같습니다. 우주를 이해하고 조화를 이루어 나가는 원칙, 규칙 같은 것입니다. 그에 비해 에피쿠루스 학파는 최소한의 욕심, 그러니까 예를 들어 가장 이상적인 식사의 기쁨을 가족식사에서 찾는 것입니다. 그러면 매일같이 집에서 밥을 먹은 사람은 매일 최고의 행복을 맛볼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최고급 외인을 곁들이고 최고급 호텔의 스카리 라운지에서 신선한 아스파라거스와 함께 부드럽기 짝이 없는 송아지 고기 요리를 먹어야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아마 일년에 몇차례난 행복할 수 잇을 지 모르겠습니다. 분모를 작게 만들면 분자가 비록 작더라도 큰 값이 나올 수 있습니다. 쾌락은 그렇게 얻을 수 있습니다.

우주를 이끄는 원리에 스스로를 맞추어나간다는 점에서는 양쪽이 같습니다. 하지마 원리의 정의는 다릅니다. 방편으로서의 금욕인가 목적으로서의 금욕인가 하는 데서 차이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대담이 될런지요.

아무튼 제 글을 열심히 읽어주셔서 다시한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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