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교 다닐 때 소브리노(Jon Sobrino)가 쓴 The Principle of Mercy 를 읽으며 세미나를 했다. 그때 난 해방신학자하면 보프 신부만 알았는데, 그것도 이름만 들어 알뿐이었는데, 소브리노란 사람도 있구나 싶었다. 어쨌든 해방신학하면 우리는 민중신학 팻말을 들 수 있어 좋다. 다만 해방신학이든 민중신학이든 “아픔”이 서려있어서 서글프다. 원래 신학은 그 컨텍스트가 아파야 하나? 그래야 뭔가 툭 튀어나올 수 있을까? 예수님이 아파서 그런건가… .

요즘 우리나라 교계는 그야말로 진흙탕인데, “사마리아 교회”라고 적어 놓은 글을 읽으니 좋다. 정리했던 걸 읽어 보니 선한 사마리아인 얘기를 끌어 와서 소브리노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 같다. “돌 맞은 놈이 돌 던진 놈을 용서한다.”

1. 자비의 교회
소브리노는 교회는 자비의 교회이어야 한다고 단언한다. 그래서 그는 교회의 네 가지 표지에 자비(mercy)를 추가한다. 그는 적어도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질문한다. 그의 답변에 의하면, 그리스도가 교회의 몸이라는 것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소브리노가 말하는 참된 교회의 모습이다. 참된 교회의 모습의 예증을 소브리노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찾는다. 강도만난 자를 돌보는 사마리아인의 마음을 소브리노는 한 마디로 자비의 마음으로 규정한다. 또한 소브리노는 이 자비의 마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라고 한다. 따라서 자비의 교회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자비를 행하는 교회이다(사마리아 교회).


2. 자비의 원리
소브리노는 심리적이고 감정적, 맹목적인 자비를 경계한다. 다시 말해서 그는 측은지심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지만, 그것만을 품고 있다면 아무런 영향력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자비의 원리”(the principle of mercy)를 세운다. 소브리노가 말하는 자비의 원칙이란 행위 내지 실천으로 드러나는 자비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예수께서 일하시는 근본적인 원칙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모든 사역의 근저에는 자비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예수의 사역 내지 선포의 내용은 무엇일까? 소브리노는 말하기를, 예수는 희망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역을 선포하며, 이것이 바로 예수의 자비이다. 따라서 소브리노에 의하면, 자비는 악의 세력에 대한 저항일 뿐만 아니라, 약자 편에 서는 모습이다. 그래서 그는 마태복음 25장을 근거로 들면서 단언한다: “자비를 행하는 자들은 구원되었다.”


3. 고통당하는 세계를 위한 신학
당연히 소브리노는 자비의 원리를 자신의 신학의 원칙으로 삼는다. 두 말할 필요 없이 라틴 아메리카의 상황은 그의 신학의 장이다. 그는 보다 적극적으로 라틴 아메리카의 민중들을 십자가에 달린 민중으로 정의한다. 그는 라틴 민중의 고난과 고통을 야웨의 고난당하는 종의 개념과 일치시킨다. 이를 통하여 그는 라틴 아메리카의 사회, 경제, 정치적 억압의 문제를 십자가에 달린 모습에 비유한다(십자가에 달린 민중). 그러므로 십자가에 달린 민중은 하나님의 참된 종인 십자가에 달린 현실의 그리스도이다. 따라서 고난의 종은 제 3세계의 민중과 일치된다.

라틴 아메리카에서의 “십자가에 달린 민중”은 야훼의 참된 종인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현실화”로서 양자는 서로를 가리키고 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달린 민중은 고난당하는 수동적 객체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구원을 가져오는 능동적인 존재로 규정된다. 이런 측면에서 소브리노는 “십자가에 달린 민중은 곧 구원의 담지자이며, 구원을 가져오기 위해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그의 종이다”라고 말한다.


4. 제3세계의 용서를 통한 화해(사랑의 지성)
소브리노는 “현실의 죄를 용서하는 것은 현 상황을 변화시키는 것이고, 억압이 존재하는 나라들 대신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며, 불의를 정의로, 압제를 자유와 해방으로, 이기심을 사랑으로,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용서의 근거는 오로지 사랑이다. 그리고 이것의 구조는 실천이 뒤따르는 자비이다. 이런 점에서 용서를 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자비의 행동을 재현하는 것이다.
그런데 소브리노에게 있어서 이러한 용서를 먼저 행해야 하는 쪽은 “십자가에 달린 민중”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이들은 구조적인 은혜를 담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중들이 담지하고 있는 구조적인 은혜란 빛, 희망, 그리고 사랑을 말한다. 이것을 담지하고 있는 민중은 모든 이에게 인간화의 가치를 제공해 줄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인간화를 통해서 제1세계와 제3세계의 통합은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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