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 글은 수정될 수 있습니다. 바르트의 논문을 읽고 감동받아 그 찌릿함을 잃을새라 마구 적은 글이기 때문입니다. 후에 한 두 번 더 읽고 차분히 정리하겠다 생각하기는 합니다. 바르트의 이 논문은,  칼 바르트 저, 휴머니즘과 문화. 하나님의 인간성, 전경연 편집, 복음주의신학총서 제3권, 1964 초판, 1989 7판, 한신대학출판부에 들어 있다. 이 논문은 그가 1956년 9월 25일 아라우(Aarau)에서 열린 개혁교회 교직자 회의에서 강연한 것이다.

2. 이 논문은 바르트 신학의 정수다. 내가 다니는 교회 목사님은 설교 중에 가끔 “성경을 읽을 시간이 없거든 로마서를 읽으십시오. 로마서 마저 읽을 시간이 없거들랑 로마서 8장을 읽으라.”고 하신다. 나도 이렇게 말하고 싶다. 바르트의 신학을 알고 싶으면 그가 쓴 교회교의학(KD)을 읽어야 하고, 그게 여의치 않다면 바르트의 <하나님의 인간성>이란 논문을 읽자. 여기엔 그의 기독론, 신론, 인간론, 교회론, 약간의 말씀론, 종말론, 구원론이 다 망라되어 있다.

3. <하나님의 인간성>을 우리말로 읽게 해 준 고 전경연 교수님께 존경과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한참 읽다가 책에 메모한 것을 옮겨 적는다. “전경연 교수님, 실제 뵌 적은 없고, 존함으로만 뵙지만, 당신께서 남기신 이 고귀한 결과물인 복음주의신학총서를 통해 저는 바르트 신학의 정수를 만납니다. 또한 전 교수님도 뵙습니다. 감사합니다.”

 

 

바르트는 포이어바흐, 슐라이어마허, 하르낙, 심지어 경건주의까지 빠졌던 오류를 끄집어 내는데, 그것은 한마디로 인간중심주의이다. 그들이 왜 이런 오류에 빠지게 되었냐면, 그들은 하나님의 신성을 존귀, 위엄, 두려움으로만 보아서 섣불리 다루지도 못하고 아예 고정된 것으로 못박아 버린 후 인간(Menschheit)만을 주목했다. 나는 여기서 바르트가 주장하는 하나님의 인간성(Menschlichkeit Gottes)과 Menschheit를 구분해야 된다고 본다. 구분해서 읽으니 이해가 쉬웠다. 내가 이해한 바로는, Menschheit와 Menschlichkeit를 하나님과 붙여서 쓸 때는 이 두 가지는 대립된 개념이다. 바르트는 이러한 경향이 religionism에 빠지거나 인간낙관주의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계한다.

이러한 경향에 반대하여 하나님은 전적 타자이심을 밝히는 주장이 등장했다. 이것을 바르트는 1차 변혁운동이라고 하는데, 바르트는 이 강연(논문)에서 이 1차 변혁운동의 문제점을 직시하고 새로운 변혁으로 나아가자고 제안한다. 일단 바르트는 자유주의 신학에 대립하여 하나님은 우리 인간과는 전적으로 타자이시고, 다른 분이시며, 분리되고, 구분되시는 분임을 내세운 것은 옳았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하나님과 인간의 무한한 질적 차이를 강조하고, 또 하나님과 인간(세상)의 만남을 탄젠트 포인트 같은 개념으로 주장하다 보니 이 또한 광기어린 반 슐라이어마허였지 않았나 하면서 성찰하고 있다. 바르트는 이 또한 추상적 하나님일 수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이교적이었다고도 평한다. 그래서 바르트는 <하나님은 전적 타자이시다>라는 올바른 개념을 우리가 잘못하여 또 하나의 우상으로 만들지 말자고 제안한다. 하나님이 전적 타자시다는 것을 잘못 강조하다 보니 이 또한 철학적 하나님 개념이 되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을 간과해 버렸다는 게 1920년대(바르트 개인의 사건으로 보면, 로마서 강해 출판과 함께)에 불어친 태풍으로 말미암아 생긴 원치 않은 결과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전적 타자성을 강조하다보니 우리가 하나님을 인간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는 분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바로 이것이 바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인간성이다. 하나님의 인간성은 제대로 파악된 하나님의 신성 안에서 발견할 수 있으며, 그 하나님의 신성 안에는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 하시는 것(Mitmenschlichkeit Gottes)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바르트의 자기성찰적 고백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어째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하나님의 인간성>인가? 어째서 이 문장(명제)이 하나님의 신성을 제대로 이해한 것인가?

1차 변혁, 곧 하나님 신성을 강조하여 그의 전적 타자성을 내세운 것의 문제점을 성찰하면서 바르트는 다시금 제안하기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통하여 하나님도 보고 인간도 보자고 제안한다. 바로 이러한 자세와 관점에서 발견한 게 하나님의 인간성이며, 그 구체적인 내용이 Mitmenschlichkeit 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라면, 우리는 추상적인 하나님이나 추상적인 인간을 볼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신이요 참 인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으로서 인간의 진실한 상대이시고, 참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진실한 상대이다. 인간과의 친교에로 낮춰진 주인이며, 하나님과의 친교에로 높여진 종이다. 가장 높은 곳에서 말해진 말씀이며, 가장 낮은 이곳(세상)에서 지금 들리는 말씀이다. 단일자(One)이며 동시에 타자(Other)이다. 이것이 제대로 된 하나님의 신성 이해이다. 즉 무한한 질적 차이로 존재하는 하나님이심과 동시에 인간이 되시고 인간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다.

하지만 바르트는 전적 타자의 하나님과 인간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 사이에 순서가 있다고 한다. 전적 타자이신 하나님이 당신의 자유와 무한한 능력으로 인간과 함께 하시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신성도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바르트는 조금 세게 하나님의 신성은 곧 그의 인간성이라고 말한다. 내가 이해하기로는,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셨고, 사랑하시며, 사랑하실 것이라는 그 사실이 하나님의 인간성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유이며 신비요, 신성의 능력이다. 설령 이것이 인간 중심으로 오해되거나 그렇게 비춰진다 해도, 성서와(더 정확하게는 성서가 증언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하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것이요, 그 사실의 고백이 바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것이고, 이 사실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를 확정하여 밝히는  것이 바로 임마누엘(Immanuel)이다. 따라서 임마누엘은 하나님의 인간성을 뜻하고, 이것이 곧 참된 신성(wahre Gottheit)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통하여 우리가 만나는 하나님의 마음은 자기 주위 사람들의 약함과 완고함과 어려움과 불행으로 말미암아 움직이며, 그분은 이 사람들을 사실 그대로 업신여기지 않고 오히려 무한히 영광스럽게 하시며, 이 사람들을 자기 마음 속에 품어주시며, 그들이 있는 곳에 자신을 내어 주신다. 그러므로 슐라이어마허의 하나님은 하나님의 긍휼을 가질 수 없다.

그러면 인간이 이루어낸 기술, 문명 같은 것은 또 뭔가? 인간의 인간성(Menschheit)은 뭔가?

바르트는 하나님의 인간성에 예속되어 있는 인간의 인간성을 주장한다. 여기서 바르트는 인간 존엄의 근거를 찾는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은 모든 인간을 포함하며 이것은 그 어느 것이라도 폐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개차반 같은 사람일지라도 그를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사실 때문에 그는 존엄하다는 것이다. 만일 칼빈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니 하나님의 신성이 인간성을 배제하고 있지 않구나 하는 깨달음을 좀 더 진지하게 생각했다면, 그가 제네바에서 그런 불쾌한 사건을 저지르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바르트는 안타까워 한다.

인간은 하나님이 은총을 베푸시는 파트너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규정하셨기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맞다. 인간 입술이 어떻게 존귀하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가! 인간의 문명을 들여다 보면 타락한 것으로 고백할 수 밖에 없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관심을 두고 보시며 때로는 개입하신다.

객관성을 얘기하며 실존주의적 신학은 인간에 대해 분석한다고 하지만, 그 또한 불가결한 객관성을 확보했다고 볼 수 있는지를 바르트는 의심한다. 신학은 다른 학문과의 관계 상황에서 신학의 본래 주제에 충실해야지 다른 학문에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는 게 바르트의 입장이다. 이러한 점을 개인에게 비유하면, 매우 멋진 그리스도인, 세련된 그리스도인으로 보이나 실제는 말씀도 안 읽고 기도 안 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면 안 되듯이 신학도 그렇게 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바르트는 신학은 긍정적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신학이 긍정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구약의 여러 심판 선언, 세례 요한이 회개 안 하면 큰일난다고 하는 것, 계시록의 위협적인 종말 이야기 등은 그것이 결론이나 최종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근거한다. 그렇다고 신학이 긍정적이어야 한다는 사실이 인간의 신성에 대한 긍정은 절대 아니라고 바르트는 아예 선을 긋는다. 인간은 하나님이 불의한 인간에 대해 <아니오>(Nein) 하신 인간일 뿐이다. 이것을 인간의 신성화로 연결하면 그것은 오류다.

이렇게 주장하는 그에게 ‘그렇다면 당신은 보편구원론(Apokatastasis)을 말하는 거요?’라는 반문이 있을 것을 바르트는 예상하고 큰 틀에서 자문자답한다. 바르트는 우선 공포심을 갖지 말자고 한다. 또한 적개심도 갖지 말자고 한다. 둘째, 그는 큰 틀에서 골로새서 1장 19절 말씀을 생각하자고 한다. 하나님이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만물을 자기와 화목되게 작정하셨다는 사실 말이다. 셋째, 만인구원인가? 그렇다면 우리가 믿을 필요가 어디 있나는 식의 주장, 율법은 필요 없다는 식의 주장에 대해 어떤 답을 내릴 것인가?라는 물음을 예상하며 바르트는 천지가 변해도 변하지 않는 사실은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신학이 거부할 수도, 좌지우지할 수도 없다고 한다. 바르트는 여기에서 신학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하는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말하되, 우리가 모르는 건 모른다고 겸손히 말하자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발견한 것만을 말하자고 한다.

마지막으로 바르트는 교회 이야기를 한다. 바르트가 이해하는 교회는 하나님의 인간성으로부터 부름 받은 무리요 개인이 바로 교회다. 즉 우리가 교회요, 내가 교회다. 왜냐면 하나님이 모든 인간을 위하셨으며 또한 나를 위해 기도하신다는 점 때문이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며, 나를 인정하신다고 해서 교회는 필요 없다, 예전도 필요 없다는 식의 반응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바르트는 경계한다. 그러면 교회 안을 들여다 보면 싸움도 있고, 사분오열의 모습도 있고, 권위적인 것도 있고,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도 그나물에 그밥이고 하나님이 불러 모으신 교회라고 하면서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라는 물음에 대해, 바르트는  하나님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 교회는 천박하지 않다고 단호히 막아선다. 오히려 하나님은 이상한 무리인 교회에 당신의 진수를 증거하는 임무를 맡기셨고,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감사하고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따라서 교회의 내부 사정을 보면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되심이 맞나 싶지만, 하나님의 강제적이고도 대단한 결의로 실행하셨으며 여전히 실행하고 계신 하나님의 인간성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여전히 교회의 머리시라고 한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하나님의 인간성은 또 다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르트가 강연을 마치는 말을 옮겨 적는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롬 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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