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제와 포용 (미로슬라브 볼프)

By | 2017년 9월 7일

 

이 책의 요약은 강영안 교수님이 책 뒤에 해설한 부분을 읽으면 될 것이다. 여기에는 그냥 내 생각과 느낌만 적는다. 글도 안 다듬었다. 물론 세밀하게 다 읽진 않았다.


한 인간 대 인간 사이, 민족과 민족 사이, 인종과 인종 사이에서 벌어지는 다툼, 살육, 그리고 배제의 현실은 어떻게든 극복되어야 할 세계 시민의 과제이다. 그러면 무엇으로 어떻게 실제 피가 튀기는 현실을 정리하고 치유할 수 있을까? 볼프는 자신의 체험한 이 현실에 대해 신학자로서 무언가 답을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그가 쓴 책이 [배제와 포용]이다. 

이 책에는 여러 학자의 이름과 그들의 주장이 나오지만 그는 거기에서 답을 찾기보다는 성경이 무엇이라 말하고 있는지를 찾는다. 이 책에는 여러 철학자와 사회학자의 말을 귀담아 듣고 있으나 이것은 현 시대 상황에 대한 분석을 위한 것일 뿐이고, 그는 신학자로서 자신이 인식하고 체험한 문제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살핀다. 그래서 그가 스스로 밝히듯이 자신은 철학자나 사회학자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신학자의 영역에서 배타/배제의 상황에 대해 살피겠다고 했다. 그래서 볼프는 사회구조의 변화 등의 개혁을 주장하기보다는 좀 더 인간의 언행심사에 주목하고 있다는 느낌을 나는 받았다. 왜냐하면 그가 민족/인종의 갈등 문제의 배면에는 정체성과 타자성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정체성이라고 할 때 결국 작게는 한 개인의 정체성이 문제가 될 것이고, 이와 관련하여 타자와의 관계가 문제가 될 것이다. 결국 볼프는 성서가 말하고 있는 사람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본 인간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고찰하고 싶었고, 이런 고찰을 통해 무언가 답을 찾고 싶었지 않나 싶다. 참고로 볼프는 아마도 1990년대부터 독일에서 일어난 성서신학(Biblische Theologie. 이 작업은 연간지로 기획되어 나오고 있다. 이런 책은 번역되어야 한다.)의 이유와 목적을 공감하고 있지 않나 싶다.

이 책은 볼프가 자신의 스승 위르겐 몰트만의 신학에 벽돌 한 장 더 올리고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게끔 한다. 몰트만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이해하며 페리코레시스(상호 교통, 상호 내어줌)를 가져오는데, 볼프도 그 개념을 그대로 가져온다. 그리고 그는 몰트만이 십자가를 하나님이 사람과 연대하시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는 부분도 그대로 가져온다. 몰트만이 큰 틀에서 자기를 내어주시는 하나님의 개념을 연대라는 말로 소개했다면, 볼프는 자기 내어줌이 무엇인지를 좀 더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볼프는 십자가의 포용을 받은 사람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그것 만으로 끝나버린다면 그것은 값싼 은총이라고 비판하고, 구속 받은 자가 타자를 용서하며 살아야 한다고 한다. 그는 이것을 매우 중요한 주제라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신약성서 전체 주제가 자기를 내어 주는(포용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며, 교회의 세례나 성만찬도 바로 이것으로 귀결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볼프가 제기한 배제의 문제는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여기서 우리는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포용함을 입은 자가 타자를 위해 자기를 내어주는데 왜 폭력, 억압, 살인은 여전히 멈추지 않는가? 아니 나 개인의 내어줌은 효력이 별로 일지 몰라도,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을 내어주셨는데도 왜 세상은 이토록 처연하게 무자비할까? 어떤 이는 이 고민의 답을 미래로 밀어놓기도 한다. 하나님 나라가 와봐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은 잘 모르겠다고 하며 열어놓자고 한다. 결국 already, not yet 이란 말의 다른 표현이다. 그런 글이나 설교문을 읽을 때면 겸손하구나 싶기도 하지만, 이게 뭐하는 건가 싶기도 하다. 물론 그것이 현실 도피도 아니고 틀린 말도 아니다. 

볼프는 포용하며 사는 것(자기를 내어주며 사는 것)은 실제로 위험하다고 한다. 억압과 죽음이 따른다고 한다. 당연하다.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살아내려 오지 못했으니.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는 그렇게 가벼운 외침이 아니다. 볼프는 십자가에 담긴 약속(부활의 희망과 약속이리라)을 붙잡자고 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나의 부활로 수용하자고 한다. 정말 쉽지 않다. 부활은 일단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지 아니하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주님의 말씀이 보통 심각한 말씀이 아니다. 죽지 않을 표, 배제당하지 않은 표를 받은 가인이 적극적으로 포용하며 살아가야만 한다는 것은 우리 각자의 삶에 주어졌다. 그런데 사람은 정말 포용하며 살 수 있는 존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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