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영배 교수의 칼 바르트 성령론 비판 논문을 읽고

By | 2017년 9월 7일

칼 바르트는 성령의 독자적 위격을 부인하고, 성령의 영감과 조명을 구분하지 못하는가?

논문: 차영배, 칼 바르트의 성령론 비판, 신학지남 176호, pp. 19-37과 89.

차영배 교수는 자신의 논문을 다음과 같이 전개하고 있다. 그는 우선 바르트가 소천하기 1년 전에 바젤에서 강의한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텍스트로 했던 <성령론> 세미나를 A. Dekker, G. Puchinger의 책 De oude Barth(Kampen 1969)를 통해 살핀다.1 그리고 나서 차 교수는 바르트의 <사도신경>에 나타난 성령 이해를 고찰하는데, 이번에는 K. H. Miskotte가 바르트의 사도신경 강의를 번역한 책(De Apostolische Geloofsbelijdeuis, 1935)을 요약한다. 이후 차 교수는 바르트의 「교회교의학」에서 성령론에 대한 비판점을 찾는다. 이렇게 고찰한 이후 차 교수는 바르트의 성령론을 두 가지 점에서 비판한다. 첫째, 바르트가 성령의 독특한 위격으로서의 사역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30). 차 교수는 왜 바르트는 기독론에 집착하여 성령론을 전개하려고 하느냐고 되묻는다. 동시에 차 교수는 묻기를, 왜 바르트는 하나님 본체의 존재양식(32)이라는 말로 성령의 위격성을 피하냐는 것이다. 둘째, 성경 영감설의 문제에서 바르트는 성령의 영감과 조명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34, 36f.). 차 교수의 이 두 가지 비판점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고, 차 교수가 오해하고 간과한 것도 생각해 본다.

1. 바르트는 기독론에 매여 성령론도 약하고, 그의 삼위일체론은 성령의 독자적 위격을 부인한다?

차 교수의 첫 번째 비판은 두 가지로 구분될 수 있다.

1) 기독론 일변도의 신학이 그의 성령론을 약화시켰다(29, 89). 차 교수는 바르트의 <사도신경 강해>를 요약하기를 ‘바르트의 성령 이해는 기독론에 정초한다’(25)고 본다. 아래는 차 교수가 바르트의 <사도신경 강해>에서 찾아낸 바르트의 성령 해석이다(25ff.): 객관적 그리스도론과 주관적 성령론(바르트는 성령강림을 계시의 주관적 가능성이라고 한다. 25)은 서로 구별은 되나 분리는 불가능하다(25). 우리가 ‘성령을 믿사오며’라고 고백할 때, 우리 믿음의 원천은 우리가 아니라 성령이다(26). 성령의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계시이다(27). 그러므로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객관적 사건이 여러 세대를 통해 믿어지도록 하게 하는 분이 바로 성령이다(25). 또한 성령은 하나님과 일치한다: “성부의 성자에게로 또 성자의 성부에게로 향하는 사랑이 바로 하나님 자신 속에 있고 이 영원한 사랑이 곧 성령이다”(28). 이러한 바르트 성령 이해를 차 교수는 바르트의 말을 빌려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성자 안에 나타난 성부의 계시는 바로 성령을 통한 계시이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과 세상과의 화목은 성령을 통한 화목이다”(25).

여기서 차 교수는 바르트는 성부가 성령 안에 나타난 것 정도로만 이해한다고 비판한다(37). 왜냐하면 차 교수는 바르트가 오순절 성령강림에서 성령의 인격적 강림에 대한 묘사가 부족하며, 성령세례에서 성령의 독특한 사역을 간과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37). 그러면서 차 교수는 바르트가 기독론 일변도의 신학 때문에 성령론이 약하다고 비판한다.

그런데 차 교수가 요약한 바르트의 <사도신경 강해>에서 바르트의 어떤 말이 성령론을 약화시키고 있는가? 오히려 차 교수가 요약한 것은 성령이 그리스도와 또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 드러내 보이고 있지 않은가?

2) 성령을 하나님의 “존재양식”이라 하면 성령의 위격성을 부인하게 된다. 차 교수는 바르트의 「교회교의학」에서 성령론을 비판하면서 바르트는 성령이 제3위 되심을 부인한다고 단언한다(30f.). 그는 그 근거로 바르트의 다음과 같은 문장을 언급한다: “아버지와 아들의 상호 함께함이 성령이다(Dieses Miteinander des Vaters und Sohnes ist der Heilige Geist)”(KD I/1, 492). 차 교수가 보기에 아버지와 아들이 상호 함께 함이 성령이라는 것은 성령의 위격성을 약화시킨다는 것이다. 차 교수는 바르트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 이유를 바르트의 삼위일체론 해석에서 찾는다(30f.). 차 교수는 바르트의 삼위일체 개념에서 성령은 하나님과 아들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서 나온 신 본체의 존재양식이라고 해석한다(28). 그래서 성령의 발출은 신 본체와 동질적 발출이다(28). 따라서 차 교수에 의하면, 바르트의 성령은 성령의 제3위 격위보다는 “신적 주체의 제3의 존재양식”이라는 것이다(30, 특히 각주 39와 41): “실은 바르트에게 있어서 성령만이 신 본체의 존재양식이 아니라 성부와 성자도 신의 존재양식이다. 두 신 곧 성부와 성자에게서 성령이 나온 것이 아니라 오직 한 분인 신 본체에서 발생되었다고 한다. 바르트의 이 말은 신은 한 분이라는 성경적 유일신 사상과 일치되는 듯 보이지만 그 실은 비성경적이다. 신의 본체가 따로 있고, 여기서부터 삼위가 나온 것이 아니다”(30). 그러므로 바르트는 하나님의 세 가지 존재 방식이 있고, 그 존재양식과 본질적 하나됨의 근거인 본체가 따로 존재한다고 본다: “바르트는 일체의 개념을 한 분으로 보았고, 또 이 한 분은 성부 하나님이 아니고 본체론적 하나로 보았다. 물론 삼위는 본질적으로 하나이지만, 그 본질적인 하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바르트는 마치 따로 있는 것처럼 말한다”(31). 차 교수는 바르트가 하나님의 존재 양식을 계시 양식이라 하지 않았기에 사벨리안주의는 피해갔다고 평가하나, 17세기 개혁파의 스콜라적 신학자들이 사용한 존재 양식(modus entis)가 아니라고 바르트가 부인할 수 있겠는가? 라고 되묻는다. 차 교수는 단언하기를 “그(바르트)는 분명히 삼위의 자아(Ich)를 부인한다”(31, 각주 47)고 한다.2 그래서 그는 바르트는 삼위를 완전한 인격으로 구분하여 경배의 대상으로 삼는 니케아 신조를 따르지 않는다고 평가한다: “이것은 성령이 성부 성자와 나란히 한 인격적인 격위이심을 보이는데도3 바르트는 이것을 부인하고 본체의 존재양식이라고 하지 않는가?”(32). 이렇게 바르트를 비판한 후 차 교수는 “우리는 이같은 그의 주장을 본체적 혹은 군주적 양태설의 변형이라 할 수 있다”고 결론짓는다(32).

이러한 차 교수의 비판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이 있다. 차 교수가 인용하고 있는 KD I/1, 370 쪽의 내용인데, 이 문장만 놓고 보면 바르트가 삼위를 부정하고 역동적 군주신론의 경향을 띠고 있다고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해당 쪽에 가서 차 교수가 인용한 문장 위아래를 읽어 보면, 차 교수가 바르트의 말을 한 문장만 갖고서 오해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바르트는 이 문장을 어떠한 맥락에서 적고 있느냐면, 그 범주별로 보면 삼위일체론 중 삼위 안에서의 하나 됨(Die Einhiet in der Dreiheit) 부분에서 적고 있다. 구체적으로 이 인용문은 바르트가 “인격”(Person) 개념이 “인격성”(Persönlichkeit) 개념과는 교회 전통의 삼위일체 개념에서 직접적으로 연결할 수 없음을 설명하는 부분에 나온다. 즉 하나님의 인격과 인격성을 구분하지 않으면, 삼위일체에서 하나님의 세 인격성으로 오해되고, 그래서 삼신론(Tritheismus)이 된다는 점을 밝히는 부분이라는 점이다. 더 구체적으로 보면, 바르트는 하나님의 인격성을 삼위일체론에서 언급한다면, 삼신론을 피해가자고 제안하면서 바로 이 인용문을 적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르트가 이 인용문을 쓴 배경은 하나님의 인격성을 세 가지 인격성으로 오해하지 말자는 데 있지, 차 교수가 주장하듯 하나님의 삼위를 부인하고자 함이 아니다. 오히려 바르트는 이 인용문을 적고 나서, 곧바로 “본질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본질의 동등성(Wesengleiheit)은 무엇보다도 본질의 정체성(Wesenidentität)이라는 점에서 이해되어야만 한다고 적고 있으며, 바르트는 해당 문단을 마무리하기를, “본질의 정체성으로부터 인격의 본질적 동등성이 따른다”고 한다. 즉 성부, 성자, 성령의 본질적 정체성이 같기에 본질적 동등성이 언급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히려 삼위를 정확히 구분하고 있으며 성령의 인격성을 본질적으로 주장하고 있지 않은가?

2. 바르트는 성령의 영감과 조명을 구분하지 못한다?

차 교수의 두 번째 비판점이다. 그는 바르트의 영감성의 특징을 “초시적(超時的) 영감설”이라 평가한다. 차 교수는 바르트가 ‘성경은 탁월성(priorität)을 가지며,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 자체’(32)로 이해하고 있다고 본다. 여기에서 성경이 탁월성을 지닌다는 것은 인간의 판단이나 권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지와 결정과 주권에 달려있다(33).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 말씀 자체라는 것이다. 이를 위한 근거로서 바르트가 제시하는 성경구절은 디모데후서 3장 14-17절과 베드로후서 1장 19-21절이다. 요약하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θεόπνευστος)라는 구절을 바르트는 ‘하나님의 영에 속하여 있는 것’으로 해석하여,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주어졌고, 채워졌으며, 성령의 지배하에 있다는 것이다(34). 또한 참된 성경의 저자는 성령이다: “영감의 주체는 하나님이신 성령이요, 그는 성경 안에서 또한 그 위에서 지배하시는 주님이시다”(34). 그리고 성령과 성경의 일체가 하나님의 은혜의 자유로운 행동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바르트의 주장4도 차 교수는 인정하면서(35), 바르트의 영감설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명제는 성경의 신령성을 말하는 것인데, 첫째, 성경은 인간의 통제하에 있지 않다는 것, 둘째, 신의 자유로운 사역과 그 결정에 의존되어 있다는 것, 셋째, 신의 이적으로 가능하다는 것, 넷째, 이적이기 때문에 인간적 기록이 아니라는 것, 다섯째, 이적이기에 성경 안에서 신의 임재가 단번에 이루어진 고정된 형식이 아니라는 것 등을 바르트는 구체적으로 논술하고 있다”(36). 그런데 차 교수는 여기에서 ‘바르트가 영감과 성령의 조명을 구별하지 않고 전체적으로 하나로 보았다’고 평가한다(36). 차 교수는 영감은 과거에 되어진 사건이라는 점에서, ‘성경이 영감되었다’와 ‘성경을 어떻게 읽으며 듣느냐’를 구분하자고 한다. 그러면서 차 교수는 바르트가 성령의 조명을 영감의 범주에 넣은 것은 과실이라고 한다. 차 교수는 성경을 읽을 때 우리의 마음에 등불이 비치는 것이 성령의 조명인데, 왜 그것을 영감과 얼버무리느냐는 것이다. 여기서 차 교수가 간과하는 점이 있다. 과연 바르트가 성경 영감설에서 과거 예언자와 사도들에게 영감을 준 하나님의 감동(Theopneustie)과 현재 성경을 읽는 사람의 영감을 구분하는가? 다시 말해서 예언자와 사도들(성경 쓴 사람들)은 성령의 영감이고, 오늘 우리는 성령의 조명인가? “성령의 사역이 없으면 성경은 아무리 그 근원이 거룩하고 그 영광이 클지라도 덮여져 있다는 것(35, 각주 61) … 영감된 성경이 사람들에게 읽혀지고 들려질 때 동일한 성령이 눈을 뜨게 하고 마음을 열지 아니하면 여전히 어리석은 책으로 하나의 의문으로 남는다는 것, 따라서 영감은 전체적으로 파악되어져야 한다(36, 각주 62).” 이러한 바르트의 주장을 통하여 볼 때, 바르트는 차 교수처럼 시간 차이에서 성경의 영감과 조명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성령 역사가 있느냐 없느냐를 더욱 중시하고 있지 않은가? 성경 영감설 내지 성경 읽기에서 성령 역사의 유무가 중요한가 아니면 한 분 성령의 사역 안에서 영감이냐 조명이냐의 구분이 중요한가? 한 분 성령의 역사를 영감과 조명으로 나누느냐, 하나로 보느냐는 비판점이 될 수 없다.

  1. 차 교수는 칼빈의 주장인지, 바르트의 해석인지 구분이 안 되게 적고 있다.
  2. 차 교수가 인용하고 있는 KD I/1, 370의 내용: “세 분 하나님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의 셋이 하나님의 인격성(in ihr)에서 언급되는 것이다(Nicht von drei göttlichen Ich, sondern dreimal von dem eine göttlichen Ich ist in ihr die Rede).”
  3. 차 교수는 사도행전 13:2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를 성령의 독자적 인격성의 근거로 댄다.
  4. 바르트는 고린도후서 3:4-18과 고린도전서 2:6-16을 근거로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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