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경 교수의 칼 바르트 예정론 비판 논문을 읽고

By | 2017년 9월 8일

바르트는 애매한 만인 구원론을 주장하고 있는가?

논문: 박해경, “칼 바르트의 예정론 비판”, 조직신학연구 3(2003), 67-91.

박해경 교수가 쓴 <칼 바르트의 예정론 비판>이란 논문은 제목대로 바르트의 예정론을 요약하고 비판한 논문이다. 박 교수는 이 논문을 전체 6장으로 구성하는데, 1장-5장에서는 바르트의 예정론의 특징을 요약하고 6장에서는 바르트의 예정론에 대한 박 교수 자신의 평가를 내린다.

박 교수가 정리한 바르트 예정론의 요약

필자의 견해에 의하면 아래에서 정리된 것처럼 박 교수는 바르트의 예정론을 대체로 정확히 파악했다. 일단 박 교수가 정리한 바르트 신학 및 예정론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바르트의 신학은 그리스도 중심의 화해의 신학이다(67).1 특히 그의 예정론은 신론이면서도 철저히 기독론이다(72).

둘째, 바르트는 예정론(선택론)을 복음의 총화(sum of the Gospel)이라 생각한다(68). 그러나 그는 ‘선택의 은혜’보다는 ‘은총의 선택’(the election of grace)를 강조한다(73).

셋째, 바르트는 예정론의 기초를 교회의 전통이나, 목회 방편, 경험, 하나님의 의지 같은 것에 놓이면 안 되며, 구체적인 사건에 근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69). 그래서 그는 전통 신학이 말하는 신적 작정(absolutum decretum)을 공란(blank)으로 보며 가치 없음으로 처리한다. 즉 그는 하나님의 절대적 작정을 반대한다(70, 74).

넷째, 바르트 예정론의 존재론적 근거요 인식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이다(70).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선택 속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의지를 보려고 한다(75). 따라서 그의 선택론은 신론이면서 철저하게 기독론이다(72).

다섯째, 바르트는 예정론을 하나님의 존재론이 되게 했고, 그는 전통적인 신학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존재와 사역을 구별하지 않는다(71).

여섯째, 바르트는 개인 위주로 설명되던 예정론을 공동체에 관심하게 했다(76, 81).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과 교회를 심판과 자비의 유비로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두 가지 규정된 모습으로 본다(76f.). 따라서 바르트의 이중 예정 개념은 그리스도의 양면적 모습에서 찾아야 한다(80). 그러므로 바르트는 피택자들과 유기자들을 함께 보고자 고집한다(81).

박 교수가 제기하는 바르트 예정론의 문제점 

박 교수가 바르트의 예정론에 제기한 문제를 필자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한다.

첫째, 왜 바르트는 선택론을 신론의 사역론에 한정하지 않고, 신론의 존재론 영역에서까지 다루고 있는가?(69, 71, 84)

둘째, 왜 바르트는 하나님의 절대적 작정(이중 예정: Praedestinatio gemina)을 허무맹랑하다고 말하는가?(74, 82f., 85)

셋째, 예수 그리스도 일원론(christomonoism)으로 처리하는 바르트의 예정론은 은혜 일원론 내지는 은혜 운명론이 되어 결국 만인구원설을 주장하는 것 같다. 즉 모든 인간을 (하나님과: 필자 첨가) 존재론적으로 화해시킨 것이다(68, 87).

박 교수의 오해

첫째 문제와 관련하여서, 박 교수는 바르트의 하나님 존재 이해 방식을 오해하고 있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존재와 사역을 분리하지 않는다: “이 (하나님의: 필자 첨가) 행위는 하나님의 존재 그 자체와 같은 것이다”(72. 각주 27번 CD II/2, 79). 또한 “하나님은 선택하시는 자가 아니고는 존재하지 않으시며, 하나님이 되기를 원하지도 않으신다는 것이다”(72. 각주 28번 CD II/2, 77). 이처럼 바르트는 하나님의 행동에서 그의 존재를 보려고 한다. 이렇게 박 교수는 바르트의 사유 특징을 파악하였음에도, 박 교수는 하나님의 선택이라고 하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사역에 해당한다고 생각하여 선택론을 사역론에서만 다뤄야지 존재론까지 다루고 있다고 비판한 것이다. 예정론은 하나님의 존재 규정으로서 신론 자체가 되면 안 된다고 그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범주상 신론이 제일 큰 범주이고, 선택론은 신론 그 아래에 속하는 범주이기에, 예정론이 신론 자체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72)이 바르트의 견해를 오해하게 만들었다.

둘째 문제와 관련하여서, 박 교수는 바르트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작정을 제대로 이해하였으면서도 그의 선입견인 칼빈의 이중 예정론 때문에 억지 주장을 하게 되어 버렸다. 그가 이해한 바르트의 이중 예정은 이렇다: “예수 그리스도의 선택 속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영원한 의지는 성자의 성육신 안에서 자신을 주시는 하나님의 의지이기 때문이다”(75, 각주 43. CD II/2, 161ff.). 또한 “이제 어떤 이들은 선택받았고 다른 이들은 버림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버리심을 위해 자신을 택하시고 선택을 위해 인간을 택하셨다는 새로운 2중 예정을 말하게 되며 …”(75, 각주 44). 이렇게 정리하면서 박 교수는 김균진 교수의 해석(헤겔과 바르트, 319-320)을 첨부하기까지 한다: “바르트의 논리를 요약하면 하나님은 인간에게 복과 생명을 예정하셨고, 자신에게는 저주와 죽음을 예정하신 것이다. 이 영원한 예정은 예수 그리스도의 선택을 말하며 이 선택이 이중의 예정이라는 것이다”(75, 각주 46). 그런데 박 교수는 칼빈의 이중 예정을 근거로 왜 하나님과 예수 사이의 부자관계를 무시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선택의 주체와 객체가 다 되게 하냐며 따진다. 또한 그는 왜 성육신과 선택을 구분하지 않느냐며 따진다. 그러면서 그는 성육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 작정에서 하나님의 의지를 찾자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박 교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심판과 자비를 주장하는 바르트를 롤 플레이(role play)라고 평가한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인간을 대표한다는 것을 박 교수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셋째 문제와 관련하여서, 박 교수는 바르트의 예정론에서 만인 구원설의 징조를 본다고 비판한다. 왜냐하면 그는 바르트의 예정론을 “한편으로 그리스도 일원론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은혜 일원론이다. 그의 선택론은 은혜의 운명론이 되었다”(87)고 평가하기 때문이다. 즉 이러한 그의 주장은 코르넬리우스 반틸(C. Vantil)의 주장을 비판 없이 수용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을 좌절시킬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의 유기자란 점에서 하나님을 반대하는 자들도 역시 선택받은 자들이요, 하나님의 저주가 다시금 사람들에게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75, 각주 45번). 이러한 자신의 주장의 근거로서 박 교수는 이형기 교수의 지적도 언급한다: “바르트의 만인 구원론적 선택론이 타락 전 선택설과 관련된다고 하는 것은 이형기 교수도 지적한다”(90, 각주 113). 또한 베르쿠버(Berkouwer)도 바르트를 前택설(supralapsarianism)이라고 평가하였음을 인용한다(90, 각주 112). 또한 그는 브로밀리(G. Bromiley), 김영한, 브룬너(E. Brunner), 박아론 교수의 비판점도 소개한다(90-91). 그래서 박 교수는 여러 학자들의 주장을 등에 업고 바르트의 선택론을 평가하기를 “그의 실존주의적 사고에 의해서 영원과 현존 사이의 긴장을 그대로 간직하므로 그의 선택론은 애매성을 포함한 만인 구원론”(91)이라 비판한다. 또한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 일원론에 치중하여 빚어진 성경에서 떠나 주관주의적 해석을 가한 결과라고 보았다(91). 그러나 이러한 반틸과 박 교수의 비판은 자기 모순에 빠진다. 왜냐하면 ‘영원과 현존 사이의 긴장을 그대로 간직’했기에 바르트의 선택론이 만인 구원설이 되었다면, 오히려 영원과 현존 사이의 긴장을 유지하면 만인 구원설이 아니라 칼빈식의 이중 예정이 더 타당하지 않느냐는 점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선택과 선택된 인간을 주장하는 바르트는 오히려 타락 전 선택설이나 후택설(Infralapsarianism)의 문제에 반론을 제기한다는 점이다(KD II,2, 154). 더 나아가 바르트는 스스로 자신이 만인 화해(Allversoehnung)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KD II,2, 467).2 그러므로 박 교수는 바르트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선택을 바르트의 말에 귀를 기울여 이해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해결하셨다고 하니까, 그렇다면 모든 인간의 구원으로까지 해석할 수 있지 않느냐고 주장한 다른 학자들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하였다.

  1. 박해경, “칼 바르트 예정론 비판” 조직신학연구 3(2003), 67-91. 이하의 괄호 안의 쪽수는 이 논문의 페이지를 가리킴.
  2. KD II,2, 467: “Aber, eben darum koennen wir ihre Zahl auch nicht mit der Gesamtheit aller Menschen gleich setzen.“(하지만 우리가 그 숫자를 모든 인간 전체와 동일하다고 설정할 수는 없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