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적 사유와 그리스적 사유의 비교(보만) 요약(2001)

By | 2017-12-05

히브리적 사유와 그리스적 사유의 비교

T. Boman, 옮김, [히브리적 사유와 그리스적 사유의 비교], 분도출판사, 7쇄, 1998.

보만의 저술(연구)방법론: 언어 분석을 통한 사유의 비교

저자 보만(T. Boman) 그리스도교 이해를 위해서는 히브리적 사유와 그리스적 사유의 관계를 고찰해야 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유대교 내지 그리스도교가 헬레니즘 세계와 만났고, 옮겨졌기 때문이다. 저자에 의하면 이러한 사유의 관계문제의 포문을 학자는 하르낙이다(A. von Harnack)이다. 그러나 저자는 복음서의 헬레니즘화를 주장하는 하르낙의 판단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히브리적 사유와 그리스적 사유의 비교에서 (Canon Oliver Chase Quick) 루트베르크(G. Rudberg) 견해를 수용하여, 먼저 사유는 내용상으로 비슷하지만, 형식상 차이가 있다고 한다(22-24). 따라서 저자는 자신의 책에서 사유의 형식상 차이의 성격과 폭을 고찰하는 것이 주된 관심이라는 것을 밝힌다.

그런데 저자는 자신의 관심에 대한 반론을 간과하지 않는다. 히브리 사유는 원시적이고, 헬라적 사유는 고등적인데, 어떻게 비교될 있겠는가(올브라이트 )라는 점이다(25f.). 이러한 종교발전적 관점에 기인한 반론에 대하여 저자는언어에는 응결된 철학이 들어있다 뮬러(Max Mueller) 견해를 수용하여 답변한다(28f.). 그러므로 저자는 자신의 책에서 히브리어와 헬라어의 언어적 분석을 통하여 사유의 구조와 내용을 비교한다.

이를 위하여 저자는 1(동적 사유와 정적 사유)에서 히브리어에서 정지 상태를 동적 동사로 표현된 것을 분석하고, haya 동사와 헬라 철학의 존재개념을 비교한다. 2(인상과 외관)에서는 언어권에서의 지각을 비교한다. 3부에서는 사유의 시간과 공간 개념을 비교한다. 4(상징주의와 도구주의)에서는 사유의 사물에 대한 표현방식을 비교한다. 5(논리적 사유와 심리학적 이해)에서는 사유의 비교 결과를 기술한다.

1 동적 사유와 정적 사유

1. 동적 동사를 사용한 정지상태 표현과 haya 동사적 효력

저자는 히브리인들의 사유방식은 동적 사유방식이라고 본다(34). 왜냐하면 그는 히브리어의 정지동사에도 동적 성격이 있음을 주목하기 때문이다. 그에 의하면, 히브리어에서 정지 개념은 동적 단계의 내용 내지 결과로 이루어진 동작이라는 것이다(37). 따라서 저자에 의하면, 히브리적 실재는 active 것이며, 부동은 없다고 한다(37). 이에 대하여 저자가 예로 것을 살펴보면:

첫째, qum(1. 일어서다. 2. 서있다. 3. 자리차지하다) 동사이다( 24;3; 삼상 24:20). 여기에서서있음일어섬내지세움 결과이다(35).

둘째, 저자는 상태동사에서도 동적 성격을 주목한다(,anef: 노하게되다; 노해 있다)(38f.). 이러한 정적 동사도 고정된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나오는 주체의 행동성을 서술한다(40).

셋째, 저자는 수동형 동사(Nif,al) 사실상 능동형 동사(Qal) 대한 수동으로, Qal형에 들어있는 내적 행동성이 외부로부터 주체에 부딪혀 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한다( 14:21 kabed: 존경받다(능동); 존경이 표시되다(수동)(42).

넷째, 정지를 나타낼 있는 명사문장이라고 하더라도, 히브리인들의 감수성에 의하면 부가어적 예속성을 표현한다(44f.). 다시 말해서 주어의 동작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25:10: 야웨의 모든 길은 은혜와 성실이다).

다섯째, 정지를 나타낼 밖에 없는 haya(있다) 동사도 동사적 실제 효력(생성, 존재, 작용의 통일성) 있다(46ff.): 1. haya 앞에 절대 부정법을 사용하여 동사적 개념 강화 2. Nif,al형이 있다는 3. 동사적 의미로 수밖에 없는 다른 동사와 함께 사용( 7:7; 14;24에서 haya qum 병행사용). 그러므로 이렇게 정지상태를 동작 동사를 사용해 표현한 것과 haya 동사의 동사적 실제 효력을 근거로 저자는 히브리인들 사유의 특징을 운동적으로 이해한다: “haya 실존을 표시한다. … 실존은 작용함과 동일하다. 그것은 정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동적이다”(58).

2. 헬라적 사유에서 존재와 비존재 개념

저자는 헬라적 사유의 구조를 형식상정적으로 파악한다. 그는 엘레아 학파적 유형, 헤라클레이토스적 유형, 그리고 플라톤적 유형의 존재와 비존재 개념 분석을 통해 그리스 사유 구조를 파악한다(62). 엘레아 학파에서 존재는 부동의 존재이다. 반면에 생성소멸은 단순한 가상이며 비존재자이다. 그런데 저자에 의하면 헤라클레이토스는 비그리스적이다. 왜냐하면 그는 변화와 운동을 높이 평가하고 있기 때문이다(panta rhei: 만물은 유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헤라클레이토스도 만물유전 속에서 영원한 법칙과 조화를 찾고 있다고 한다(63). 이러한 조화를 저자는 궁극적으로 플라톤의 철학체계에서 찾는다(65). 플라톤의 이데아계는 변화가 없고, 불멸의 선의 이념, 신의 세계이다. 그런데 현상계는 이데아계와 대립된 것이 아니라, 이데아계의 부속물이다(국가론 VI, 509). 다시 말해서 모든 존재가 신의 존재에 근원을 갖고 있다. 따라서 저자에 의하면 헬라적 사유에서 존재와 비존재는 존재 내지 신이 정지하고 있느냐 운동하고 있느냐에서 구분된다고 이해한다(66). 바로 이점에서 저자는 히브리적 사유와 그리스적 사유의 내용상의 유사성을 발견한다: “그리스적 특성에 의하면 존재란 영원히 정지해 있는 , 히브리적 특성에 의하면 영원한 움직임으로 생각되기는 하지만, 존재란 현실이고 선이라는 점에서 그들은 일치하고 있다”(69).

3. dabar logos

저자는 dabar logos에서도 사유의 유사성을 본다(70 그리고 83). 먼저 저자는, 고대 근동의 신의 말은 강력한 동적 힘을 갖는 자연력으로 묘사된다고 분석한다(70). 물론 이스라엘에서 야웨의 또한 동적이라는 면에서 고대 근동의 유형과 동일하다. 그러나 야웨의 말은 윤리적인 인격성을 지닌 ( 55:6-13)이다(73f.). 특별히 저자는 창조기사에서 야웨의 말의 특수성을 행위말(Tatwort)에서 찾는다(77f. 그리고 79). 야웨의 말이 행동이다. 따라서 야웨의 말은 그의 의지가 표현된다는 점에서, 물리적 영역이 아닌 정신적 영역에 속한다(78). 그래서 저자는 야웨의 dabar 야웨의 현현양식으로 해석한다(80).

dabar 운동적 성격과는 달리, logos 수집, 정돈, 질서를 가리킨다. 그런데 저자는 logos 그리스적 이해에서 가장 높은 정신적 기능을 표현한다고 말한다(81). 그래서 저자는 dabar 이스라엘인들에게는 logos 역할을 한다고 본다. 따라서 저자에 의하면 dabar logos 정신적 측면에서는 유사하나, 형식상 상이할 뿐이다(83).

4. 개념을 포함하는 개체와 보편으로서의 Idea

저자는 히브리어에서 개체가 개념을 포함하는 집합개념이 있음을 본다(83f.) 예로서 아담은 개체이면서, 집단개념이다. 또는 tob 선이면서 동시에 선한 사람이다(85). 그런데 저자는 이러한 히브리적 보편개념이 플라톤의 Idea 개념도 유사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Idea 모든 존재자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자는, 다만 차이가 있다면, 정지냐 운동이냐라는 작용방식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86f.) 한다.

요약하면 저자는 히브리 사유와 헬라 사유를 비교하면서 일차적으로 내용상의 유사성을 찾아낸다. 유사성은 존재 내지 신의 운동적 성격이다(정지와 운동 사이). 그러나 표현방식에 있어서 사유는 정적동적으로 보이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된다: 저자는 히브리 사유는 언어분석을 하고, 그리스 사유는 개념 분석을 했는가? 야웨 계시 내지 현현이 없는 logos 히브리인들에게 dabar 역할이라고 있는가?

2 인상과 외관

1. 히브리적 묘사로서의 상징

저자에 의하면 히브리인들은 사진같은 외관에는 무관심하다(88f.). 오히려 그들은 지각된 것들에 대한 그들의 인상을 재현한다. 이러한 재현은 건축물에 대하여는 모형이 아니라, 제작과정을 소개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6:14:노아방주; 25-28: 광야성소; 솔로몬 성전과 왕국). 또한 사람이나 신에 대한 인상에서도 그의 외모 표현에 중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성품발견이 주된 관심이다(91f.: 아가서의 신부 소개; 132). 그리고 사물들에 대한 인상 또한 사물 자체의 소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에 대한 지각의 표현에 있다. 이것을 저자는 상징으로 본다(107f.: 풀과 : 무상성; 바위, : 안전성 ).

특히 저자는 히브리 언어적 분석에서 이러한 상징 개념을 통찰한다(110f.). 저자에 의하면, 히브리 언어에서 소재와 결과물 양자의 목적격은 동일하다( 38:3). 왜냐하면 용도가 같기 때문이다: “ 도구는 성분이고, 특정한 목적들을 위해 만들어졌고 목적에 사용되고 있다”(111). 저자에 의하면 인간 창조에서도 마찬가지다( 2:7: 인간=흙먼지). 이러한 관점에서 저자는 창세기 2 21-22절에 나오는 남자에서 여자 창조를 이미 갈비뼈가 흙먼지이기에 남녀 구분으로 해석한다(112). 그래서 저자는 창세기 2 24절을 구분된 남녀가 하나되는 통일로 해석한다(114). 이것을 저자는 플라톤 향연에 나오는 아리스토파네스 신화와 비교하면서, 내용적 유사성이 있다고 한다(115). 나아가 히브리인들의 이러한 상징 묘사를 저자는 구약성서에서의 의인화 경향에서 찾는다(115f.).

2. 그리스적 묘사로서의 관조

저자에 의하면 그리스 사유에서 외관은 객관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을 시각을 통해 인지함에 있어 히브리적 외관 묘사와 동일하다고 본다(135ff.). 그러나 그리스적 외관 묘사는 결코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관조를 벗어나지 못한다(137). 그런데 저자는 그리스 문학에서 인물들의 묘사가 구약성서와 같이 인물들을 성격화한다고 한다(138f.).

요약하면 히브리적 묘사나 그리스적 묘사 모두 내용상 신의 성품, 미의 아름다움, 인간의 성품 등을 드러내려는 점에서 비슷하다. 그러나 히브리적 묘사는 역동적이고, 그리스적 묘사는 관조적이다. 여기에서 또한 질문이 제기된다: 저자가 통찰하듯이 지각 내지 감각에서 상징 내지 미를 보는 것에 있어서 사유가 동일하다(103 135) 것을 수용한다면, 상징과 관조는 어떠한 점에서 다른가?

3 시간과 공간

1. 그리스유럽적 시간 파악: 공간의 연장으로서의 시간: 과거현재미래

저자는 일단 그리스적 시간 파악이 오늘날 우리의 시간 이해와 동일하다고 본다: “과거는 우리 뒤에 있고, 미래는 우리 앞에 있다”(149) 저자에 의하면 그리스적 시간 이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구형적 시간상을 언급했지만 직선 상에서 하나의 점이라는 점에서 직선적(과거현재미래)이다(148f. 특히 149). 그런데 저자는 그들의 시간 이해는 공간의 유추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150). 왜냐하면 칸트에게서 공간은 외적인 형식이라면, 시간은 관조로서 내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을 근거로 저자는 헬라적 사유에서 시간 개념 보다는 오히려 공간 개념을 중시했음을 밝힌다.

2. 이스라엘의 시간 파악: 사건으로서의 시간

저자는 일단 히브리인들의 시간 개념을 고찰한다. 그의 고찰에 의하면, 히브리인들의 시간은 시간의 내용과 동일하다(155): “ 때에는 당신의 빛이 어두움에서 빛나리라”( 58:10). 이것은 히브리인들이 빛과 어두움, 시간을 질적으로 평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헬라적(혹은 유럽적) 시간에서 시계(時界) 결정하는 것이 태양과 달의 운행이라면, 히브리적 시계 결정은 태양과 달에서 느껴지는 감수성에서 비롯된다(155f.). 따라서 히브리인들의 시간 감각은 선적, 직선적 내지 순환적인 것이 아니라, 측시기(測時器)들로부터 일으켜지는 인간의 주관적 느낌들을 객관화시킨 것이다(158). 저자에 의하면 이러한 시간 감각에서 주기성(dor, 순환, ) 나타난다(159). 그런데 주기성의 특징은 처음과 끝이라는 구획이 아니라, 끝은 처음이 다시 돌아오는 때를 의미한다. 저자는 이러한 이스라엘의 주기를 운율적, 리듬적이라고 평가한다. 그에 의하면 운율은”, 포괄적으로는휴일평일휴일이다.

여기에서부터 저자는 이러한 운율적 시간 개념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묻는다. 저자에 의하면 시간 개념에서 과거현재미래 라는 도식은 의미가 없다(163f.). 따라서 시간은 사건들의 흐름이다(165). 과거와 미래가 현재를 중심으로 수렴한다. 바로 이러한 개념에서 시간과 시간의 내용으로서의 사건은 구분되지 않는다. 이에 대한 예로서 저자는 구약성서에서 연대기적 시대들이 부분적으로 시대의 내용에 따라 지칭되고 성격지어졌음을 밝힌다(166): “낮은 빛의 때이고 밤은 어두움이다”( 1:5; 104:20).

저자는 과거와 미래로 수렴되는 현재적 시간 개념을 히브리어 동사의 무시간성에서 찾는다(170). 히브리어에서 시간은 객관적인 측정(과거현재미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에 의하면, 히브리어에서는 현재말하는 자신의 행위에 대한 방향을 어떻게 설정하고 있는가에 시상(時相) 달라진다. 따라서 완료 사건으로서의 시간은 말하는 자의 시선에서 보면, 그의 앞에 있는 것이고, 미완료 사건으로서의 시간은 화자의 시선에서 보면, 현재 진행중이거나 미래에 완료되는 화자 뒤편에 있다. 다시 말해서 저자는 현재의 화자를 중심으로 본다면, 사건이 완료된 것이거나, 아직 완료되지 않은(진행중인) 사건 밖에 없다고 본다. 그래서 저자는 히브리어 동사에는 완료형과 미완료형으로 나뉠 있다고 본다(171-175, 특히 171 173). 그러므로 저자에 의하면 이러한 화자의 관점에 따른 시상은 현재에 동시성을 지닌다.

3. 그리스적 공간 파악: 사유의 형식으로서의 공간

저자는 그리스적 공간 개념은시간도 함께사유의 형식이라고 규정한다. 왜냐하면 공간 이라는 형식이 없다면, 플라톤이든 칸트이든 간에 사유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182-184). 칸트와 플라톤에게 있어서 감성적 형식으로서의 공간은 사유의 출발점 내지 근거이기 때문이다: “플라톤에게는 형식이 영원을 감지하는 수단인 반면, 칸트에게는 형식이 감성 세계를 경험하고 이해하는 수단이다”(184). 따라서 공간 개념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 형식 혹은 테두리(경계선)이다(186).

4. 히브리적 공간 파악: 내용을 지시하기 위한 공간

그러나 저자에 의하면 히브리 언어는 어떤 대상의 개요 혹은 윤곽을 표시하기 위해 고유한 표현을 만들지 않았다(184f.). 이에 대한 예들 하나를 살펴보면, 이사야서 53 2절의 mar,ä(외관, 현현) 인간의 외모를 나타내는데, 이것은 인간의 탁월한 성품을 나타내는데 쓰인다(185). 그러므로 저자에 의하면, 경계를 나타내는 히브리어 gebul혹은 동의어들도 영역 사이의 분기선 내지 경계선을 뜻한 일이 번도 없다고 한다(188). 따라서 저자가 고찰한 히브리적 공간 개념은 시간개념의 연장선에 있다. 심리학적 공간 개념이다.

요약하면 그리스적 시간 개념은 공간에서 유추된 과거현재미래의 직선적 시간이다. 따라서 그리스적 공간 파악은 명확한 경계선 내지 테두리가 있다. 따라서 이러한 사유에서는 크기와 (數) 공간적으로나 양적으로 표현된다(193ff.). 이에 반하여 히브리적 시간 개념은 공간으로부터 구획된 것이 아니라, 화자 내지 관찰자의 심리적 의식을 객관화시킨 것이다. 따라서 화자의 현재에 과거와 미래가 수렴된다. 그러므로 그들의 공간 개념은 구획적이지 않고, 심리적 표현을 위한 하나의 수단이다. 이러한 사유에서 크기와 수는 동적인 묘사를 통해 표현하고, 질적인 표현을 위한 수단이었다. 여기서도 문제가 제기된다: 저자는 그리스어에서 시간과 공간을 의미하는 언어는 분석하지 않았는가?

4 상징주의와 도구주의

1. 히브리적 사물 파악: 도구적 사물

저자는 퀵의 견해를 수용하면서 히브리어에서 사물을 표시하는 말이 없다고 단정한다(217). 저자가 예시한 , 가지를 살펴보면, keli(도구, 기구) 있다. 단어는 분명 대상 개념에 가깝지만, 단어의 파생의미들은 모두 기구나 도구, 무기를 지칭한다( 71:22; 6:2; 27:3 ). 그러므로 저자는 히브리적 사물을 지칭하는 단어는 히브리인들의 동적인 현실파악과 내적 관련이 있다고 본다. 어떤 행위에 그것을 이용하는가에 초점이 있다는 것이다(218).

2. 그리스적 사물파악: 상징적 사물

마찬가지로 저자는 그리스적 사물파악은 인식수단으로 보는 퀵의 견해에 동의한다(218). 철학적 사물 파악의 이유는 사물 자체에 있지 않고, 사물을 존재하게 하는 원리나 질서를 인식하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218f.). 따라서 여기에서 존재자로서의 사물은 존재의 원리를 반영하는 혹은 상징한다.

저자는 결론적으로 언급하기를: “외적인 사물들을 우리의 인식에 관련시키면, 그것들은 표식들(Zeichen) 혹은 표징들(상징들)이며, 그것들을 우리의 행동에 관련시키면 도구 혹은 용구이다”(219). 그러나 여기에도 여전히 남는 질문이 있다: 어떠한 이유에서 저자는 2장에서 외관이나 인상에 대한 기술에서 히브리적 파악으로는 상징적 묘사 내지 인상으로, 그리스적 파악으로는 관조적으로, 이곳 4장에서 사물에 대한 묘사에 있어서는 도구적인 사물로, 상징적 사물로 바꾸어 평가하는가?

5 논리적 사유와 심리적 이해

저자는 그리스적 사유를 논리적 사유로, 히브리적 이해를 심리적 이해로 구분한다(227ff.). 저자에 의하면, 논리적 사유는 사유자가 대상에 대해 객관적으로, 사실 밖에서 관조하는 것이다. 반대로 심리적 이해는 사유 주체가 대상과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대상 속에서 체험하는 이해이다. 그런데 저자는 가지 방식이 인식론에서 불가분리로 결합되어 있음을 밝힌다. 저자에 의하면 그리스인들은 철학과 과학의 영역에서, 이스라엘인들은 종교와 도덕의 영역에서 공헌했다(230) 점에서 구분되지만, 그리스 철학이 도덕과 종교에서 절정을 이루었고, 반대로 이스라엘은 종교적인 문제를 철학의 대상으로 삼게 했기 때문이다(230-231). 여기에서 저자는 이스라엘 사상가들의 독창성을 언급한다. 그에 의하면, 이스라엘 사상가들의 독창성은 소재의 논리적 개작에 있지 않고, 오히려 종교적 관심(信心) 따른 인용, 개작, 창조에 있다(231ff.).

또한 저자는 사유 방식의 특성을 시각적 성격과 청각적 성격으로 평가한다(235f., 241f.) 왜냐하면 철학의 사유 방식은 관조적이기 때문이고, 구약성서에서는 청각과 발설되고 있는 말의 의미가 현저하게 부각되어 있기 때문이다(235-236). 이에 대해 저자는 사유의 진리 개념을 비교한다. 그리스적 진리 개념은 존재 개념이다. 반면에 히브리적 진리개념은 말의 확실성 내지 신뢰성에 있다.

진리개념 분석으로부터 계속해서 저자는 사유 방식의 특성을 종합적 그리고 분석적 성격으로 평가한다(237f.). 저자에 의하면 그리스적 사유는 종합적이다. 이를 위해 저자는 λόγος λέγω(수집하다)에서 파생된 것을 예로 든다. 반면에 히브리적 사유는 분석적이다. 이를 위해 저자는 히브리어의 bin(이해하다) 동사는 본래분리하다’, ‘구별하다 의미를 갖고 있음을 예로 든다. 저자는 다른 예로서 설득을 위한 히브리인들의 비유와 반복의 기법(비교 평행법) 소개한다(238).

결론적으로 그리스적 사유는 논리적, 종합적, 관조적, 정적 사유이다. 반면에 히브리적 사유는 심리적, 분석적, 청각적, 동적 사유이다. 여기에서 저자는 재차 사유의 관계성을 제시하는데, 장소는 바로 현실이다. 이것을 그는 원자물리학을 빌어 소개한다(餘角 현실): “외견상 논리적으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표현들을 사용치 않고는 그것들을 바로 묘사할 없다”(243); “그리스인들은 현실을 존재로, 히브리인들은 현실을 운동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현실은 양자, 말하자면 동시적으로 양자이며, 이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지만 역시 옳다”(243).

저자는 책을 기술하면서 결정적으로 방법론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 저자는 히브리 사유와 그리스 사유를 각자의 언어분석 방법을 통해 비교한다고 서두에 제시했다. 그러나 히브리어 분석은 대체로 분석되어 있으나, 헬라어 분석은 전무하다. 따라서 책은 언어분석과 개념분석 비교로 구성되었다. 바로 이점을 바아(J. Barr) 지적한다: “ 방법들(보만의 방법: 발제자 ) 히브리적 사유방법과 그리스적인 사유방법에 관한 어떤 지식에 근거를 두고 있지만, 성서에서 사용된 히브리어와 그리스어의 언어학적인 사정을 시종일관 부당하게 취급하고 망쳐버렸다”(259). 이에 대한 저자의 답변은 언어와 사유는 분리될 없고, 그래서 언어 내지 단어(낱말) 속에는 개념이 필연적으로 포함되어 있다고 답변한다(267f.). 그러나 책에 대한 불트만의 서평을 고려한다면, 그리고 저자의 답변처럼단어에는 이미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것을 숙고한다면, 헬라어 분석이 간과되어 있다는 것은 언어 비교 방법론에 있어서 오점으로 남을 있다. 과연 언어분석과 개념분석은 동일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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