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ossan, 예수는 누구인가, 한국기독교연구소, 1998

By | 2018-07-03

한평생 역사적 예수 연구에만 천착해온 학자가 일반 대중과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연구결과를 알린다는 것은 -저자의 역사적 예수상에 대한 견해에 대한 갑론을박을 떠나서- 올바른 일이다. 저자는 독자들과 대화하려고 초대장을 보낸다. 초대장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예수를 1세기 유대인들의 모국 안에서, 그들의 고유한 배경 안에서 예수를 바라보기 위한 시간 여행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저자의 초대를 받은 필자는 사뭇 저자를 곤혹스럽게 만드는 질문을 만날 때마다 어떻게 답변할까를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저자는 시종 일관 예수는 진짜 인간(real person)이라는 것을 놓치지 않는다. 저자는 복음서에서 인간으로서는 기대할 수 없는 모든 진술을 예수에게서 분리한다. 그래야만 진짜 예수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가 기적을 행하는 등등의 이야기들은 그를 믿는 공동체의 신앙고백에 의해 이루어진 상(Vorstellung)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가 재구성해낸 역사적 예수는 사회-정치적 모습을 띤 한 인간의 모습이다. 이렇게 저자에 의해 재구성된 예수는 현실적으로는 포용과 관용의 사회관계의 모습을 실천한 인물이다. 그런 인간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스도로 신앙한 것은 예수를 믿는 신앙공동체의 작업이다. 

저자의 책에서 놓치지 않아야 할 것은, 저자는 역사적 예수의 연구는 “역사적-합리적”이어야 한다는 전제로부터 시작하여, 예수를 한 인간으로 발가벗기지만, 그런 예수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한 것을 본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신앙고백은 역설적으로 크로산과 같은 과정을 거쳐야 더욱 단단해질 것이다. 성찰 없는, 학습된, 맹목적 신앙고백은 예수 그리스도를 오히려 욕되게 만든다.

왜 이 책이 필요한가?

저자는 이 책의 필요성을 세 가지로 본다. 첫째, 일반 독자들을 위해 예수 연구의 기본적 질문들과 결론들에 대한 간략하고 읽기 쉬운 책의 필요성, 둘째, 라디오 대담프로그램과 신문 인터뷰에서 일반인이 예수에 관해 질문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저자가 파악했기 때문이다(책의 구성도 질문과 대답 형식으로 되어 있다). 셋째, 저자의 저술들을 읽고 독자들이 보내온 편지를 소개함으로써 사람들이 역사적 예수에 관해 어떠한 생각을 갖고 있는지 드러내는 것이다.

1장 왜 복음서를 읽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는 것일까?

저자는 일단 역사적 예수 연구를 위한 텍스트로서 복음서의 문제부터 언급한다. 복음서에는 네 개의 복음서가 있는데, 서로간에 불일치되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의 복음서는 복음서 기자가 몇 개의 자료를 놓고 첨삭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변형시킨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저자에 의하면, 현재의 복음서는 복음서 기자가 역사적 예수에 대해 쓴 “전기”가 아니라, 예수에 대한 “의도적 해석”이다. 또한 저자는 복음서 이외에도 예수에 관해 기록한 문서가 있다는 것을 간과하지 않는다. 저자는 Q 자료를 하나의 독특한 신학을 가진 하나의 복음서로 보며, 도마복음서도 언급한다.

여기에서 저자는 질문한다: 역사적 예수에 관한 텍스트들이 전기가 아니라, 기자의 의도적 해석이라면 어떻게 역사적 예수를 재구성할 수 있는가? 여기에서 저자는 자신의 연구방법론을 밝힌다. 첫째, 교차문화적 연구이다. 이 연구방법은 예수 당시의 사회적 상황을 재구성할 수 있게 해준다. 저자는 예수의 사회와 유사한 모든 사회들을 역사를 관통하여 검토하겠다고 한다. 둘째, 역사적 연구이다. 저자에 의하면, 이 연구 방법은 예수 당시의 그리스-로마 및 유대인들의 상황에 관하여 역사적으로 연구하는 것이다. 이 연구에서 저자는 요세푸스의 저술을 갖고서 연구하겠다고 한다. 셋째, 본문연구이다. 저자는 이 연구가 가장 어려운 작업이라고 하는데, 왜냐하면 복음서 내지 기타 자료에서 문헌전승을 구분해 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문헌전승이란 대체로 세 가지 단계로 나누어 질 수 있는데, 첫째는 역사적 예수 자신이 한 말씀과 사건들이다. 둘째는 이러한 자료가 발전되고 전승되는 단계이다. 셋째는 예수에 관해 새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져서 예수에게 덧붙여지는 단계이다. 저자는 이러한 세미한 작업을 통해 역사적 예수 상에 가까이 이르고자 시도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한 저자는 문제를 제기한다: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에 관해 진실을 말하지 않았는가? 일단 저자는 복음서에서 진술되고 있듯이 원시 공동체는 예수에 관해 경험했음을 인정한다. 그런데 저자의 관심의 초점은 이 경험의 전승 내지 전달에 있다. 구체적으로 예수 경험이 예수 전승으로 되는데, 여기에 전달자들이 복제하듯이 전승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이것은 창조적 전승이라고 볼 수 있는데, 예수 연구 텍스트로서의 복음서가 강조점이 서로 다르고, 변형된 것에서 저자의 관점은 이미 자명하다. 이렇듯 예수 전승자들은 당시 자신들의 특정한 필요와 기대에 의해 예수의 말과 행위에 대한 해석된 진술을 시도하였다.

이렇게 연구자료가 예수에 대한 재해석의 자료들이라는 상황에서, 저자는 나름대로의 원칙을 세워 연구 자료층을 구분한다. 저자의 원칙에 의하면, 1세기의 30년에서 60년 사이에 기록된 가장 오래된 전승의 층과 예수 이야기가 전승자료의 한 곳 이상에서 발견되는 곳을 주목한다. 왜냐하면 저자는, 이것이 바로 본질적 예수(The essential Jesus)에 가장 가깝다고 보기 때문이다.

2장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 처녀 마리아의 아들인가?

이제 저자는 예수의 출생부터 추적한다: 복음서의 탄생 이야기들이 역사적 예수에 관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저자에 의하면 역사적 예수가 진짜 인간(real person)이었다면, 그리고 저자 자신이 한 사람의 신앙인으로서 보다는 한 사람의 역사가로서 정직하다면, 복음서에 나타나는 예수 탄생 이야기는 종교적 창작이나 비유이다. 저자는 이러한 종교적 창작으로서의 탄생이야기들이 탄생 이야기들의 가치를 무효화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문자 그대로의 역사적 사실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밝힌다. 저자는 예수 탄생 이야기는 오페라의 서곡처럼 이해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마태와 누가가 서로 다르게 예수 탄생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그러면 예수 탄생 이야기에서 마태와 누가의 차이는 무엇인가? 마태와 누가에서만 예수 탄생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고 마태와 누가에서 예수 탄생은 서로 상이하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마태나 누가 저자 자기만의 고유한 일화나 배경설정을 갖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또한 이 두 복음서가 의존하고 있는 마가 복음서에는 예수 출생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러한 점을 미루어 볼 때 저자에 의하면, 우리가 예수의 출생에 관해 반듯하게 정리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예수 출생 이야기가 역사성을 의심받는다면, 도대체 그 의미는 무엇인가? 저자에 의하면, 마태와 누가에 나오는 예수 출생 이야기는 예수의 청중들의 화제 속에서 예수가 차지한 위치를 두 복음서 기자가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저자는 하나의 예로서 누가복음의 출생 기사를 언급한다. 누가복음에는 세례 요한 출생과 예수 출생이 나오는데, 세례 요한을 이스라엘의 위대한 신앙 영웅들에 연결시키면서, 동시에 예수는 요한 보다 더 위대하다고 나타난다. 마태에서는 모세와 예수가 비교되고 있는데, 누가복음과 마찬가지로 예수는 더 위대한 모세라는 것이 부각된다. 이것이 바로 마태와 누가 복음서 기자의 관심이요, 이러한 관심 안에서 예수 출생 이야기는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태와 누가는 예수의 처녀탄생을 동의하는데, 그렇다면 종교적 창작인 탄생 이야기가 어떻게 이렇게 같을 수 있을까? 이것조차도 믿을 수 없는 것인가? 저자에 의하면 예수에 대한 신앙 속에서 재해석하고 있는 복음서 기자는 예수를 구약성서와의 연결(이사야 구절) 속에서 보려고 애쓴 흔적이다. 구약 성서에서 처녀가 아들을 낳으리라는 구절을 예수의 탄생에까지 역투사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에 의하면, 예수의 처녀탄생은 예수의 구원사적 의미에 관한 당시 저자들 내지 공동체의 신앙고백이다. 이처럼 저자는 사실의 진술(a statement of fact)와 신앙의 진술(a statement of faith) 사이의 구분을 강조한다.

그렇지만 저자는 이렇게 모두 역사성을 의심할 만한 상황에서도 출생 이야기에서 우리가 어느 정도 알 수 있는 것이 있다고 한다. 그것이 바로 예수 내지 예수 가문의 사회적 위치라는 것이다.

3장 세례자 요한은 예수와 어떤 관계에 있었는가?

저자는 이제 예수의 유년기와 공생애 직전까지를 탐색한다. 유년기 탐색은 12살 때 성전에 올라가신 장면을, 공생애 직전에는 세례 요한으로부터 수세 장면을 탐색한다. 특별히 그가 줄잡고 있는 것, 전제로 삼고 있는 것은 세례 요한 보다 더 위대하게 예수를 묘사하려고 한 저자의 의도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예수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그가 12살 때 성전에서 대제사장들과 토론한 장면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 토론 장면에 대한 복음서 기록뿐만 아니라 요세푸스의 기록조차도 사실적인 내용을 제공하고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저자는 예수의 아버지가 목수였다는 것을 간과하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는 목수 직업에 대하여 교차 문화적으로 고찰한다. 당시 사회에서 목수의 계급은 장인계급 정도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농민보다 낮은 계급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성전에서 대제사장들과 토론한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장면은 종교적 창작인 것이다.

저자는 이제 예수가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사실성이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것은 복음서 저자들의 전제와 상치되기 때문이다. 또한 기독교 전승에서 이 장면을 아주 곤혹스럽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저자에 의하면, 이것은 역으로 역사적 사실성을 증명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저자는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 등의 진술은 모두 복음서 기자들이 추가한 것으로 본다. 저자는 “인자” 용어도 일반적 용법인 일인칭 내지 인간 일반을 의미한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인자의 묵시사상적 용법은 진짜 예수가 아닌 예수 사후에 덧붙인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가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예수는 요한의 제자였는가? 저자는 일단 예수가 요한의 묵시종말적 신앙의 전통에서 출발한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저자는 예수가 요한의 사명과 메시지에 대한 그의 관점을 바꾸셨다는 것을 주장한다. 요한의 메시지가 미래적이라면, 예수의 메시지는 현재적이라는 것이다.

4장 예수는 무엇을 가르쳤는가?

저자는 이제 예수의 공생애에서 그의 가르침을 탐색한다. 저자에 의하면, 예수의 선포가 세례 요한과 다른 것은 하나님 나라의 묵시종말적 희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회적 혁명(divine social revolution)으로서의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것에 있다. 저자는 만일 하나님의 나라에 의해 통치되는 세상은 어떤 것인가를 질문한다. 저자에 의하면 이것은 철저히 종교적, 정치적, 도덕적, 경제적 통치이다. 왜냐하면 요한의 메시지를 예수가 바꾸어 놓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묵시종말적 통치를 기다리기보다, 우리가 사회적 혁명을 시작하기를 기다린다는 것으로서의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를 증명하기 위하여 저자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의 실천적 결과를 고찰한다. 우선 저자는 예수가 왜 “가족의 가치들”(family values)를 거부했을까를 숙고한다. 저자에 의하면 예수는 혈연이라는 무조건적 공동체 관계 보다는 그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에게 개방된 공동체를 선호했다. 저자에 의하면, 이것은 예수가 희망했던 실제적인 하느님 나라로서의 공동체는 권위적, 폐쇄적이지 않은, 평등하고, 개방성의 교감이 있는 공동체이다. 따라서 저자는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다는 예수의 말씀은 사회적 계층의 감각을 갖고서 들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예수의 가르침은 개인적 악 보다는 체제적인 악에 대한 비판이다. 그리고 저자는, 예수는 이러한 자신의 신념을 행동으로 옮겼고, 다른 이들도 이러한 행동으로 초대했다고 한다. 저자는 여기에서 역으로 고찰하기를, 만일 예수가 하나님의 나라를 말로만 외쳤다면, 갈릴리 하류계층 사람들은 아무런 감동도 받지 못했을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저자는 에수가 관습적인 사회 규범들을 위반하면서까지 사람들을 공동의 밥상(common table)에 초대한 예수의 적극적인 실천이 바로 예수의 가르침이었다고 한다.

5장 예수는 기적을 행했는가?

저자는 계속해서 이러한 그의 가르침이 병고침에서도 선포 내지 실천되고 있다고 본다. 특히 저자는 예수가 병을 공짜로 고쳐준 사실에 주목한다. 여기에서 저자는 자연기적과 병고침 내지 귀신축출을 구분한다. 그에 의하면, 전자는 예수의 제자들을 (혹은 어머니를) 위해 행해지지만, 후자는 외부인들을 위해 행해졌다는 것이다. 저자는 예수가 오병이어 기적이나 물고기를 많이 잡게 하는 것은 모두 상징적인 것이라고 본다. 저자는 이를 해석하기를, 예수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예수와 함께 라면 가능하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고 본다. 그러므로 저자는 자연 기적들을 문자 그대로 읽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본다.

저자는 병고침을 사회적 시각에서 본다. 그는 육체가 한 사회의 상징이라고 본다. 저자는 예수가 환자를 치유할 때, 그가 단지 병의 치유자로서 행동하는가 아니면 사회에 대한 비평가로서 행동하는가를 묻는다. 저자는 질병을 치료하는 것과 고통을 치유하는 것을 구분한다. 저자에 의하면, 질병은 육체적인 초점으로서 좁게 보는 것이고, 고통은 문제를 더 넓은 심리학적, 사회적 정황 속에서 보는 것이다. 한 인간인 예수는 질병을 치료할 수 없지만, 고통을 치유할 수는 있다. 저자는 예수가 나병환자를 치유한 것은, 그로 하여금 다시 사회적 관계성 속으로 불러들임으로써 고통을 치유했다고 본다.

이러한 점에서 저자는 기적에 대한 자신의 개념을 설정한다. 저자에 의하면, 기적이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는 초자연적인 힘의 사용이라면, 예수의 치유는 기적이 아니며, 또한 예수가 제자들에게도 똑같은 일을 행하라고 했으므로 예수의 신성의 증거도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예수는 물리적 질병을 치료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를 통해 고통을 치유했다.

그렇다면 귀신축출은 어떤 의미인가? 저자는 마가복음 5장 1-17절의 귀신축출 장면은 실제 장면이 아니라고 한다. 그 이유로 저자는 복음서에 이러한 축출 장면이 있지만, 각각의 이야기는 다른 자료에 의해 뒷받침 되고 있지 않다는 점을 밝힌다. 저자는 귀신을 축출하는 예수의 모습은 후대에 창작된 이야기들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저자는 기적이라고 확신 내지 단언하는 것은 하나의 신앙고백이요 신앙행위로 밖에 이해될 수 없다고 한다.

6장 예수는 새로운 종교를 창설할 생각을 갖고 있었을까?

저자는 예수가 기독교를 창설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고 본다. 왜냐하면 예수의 의도는 로마의 식민주의와 도시화 때문에 심한 압박 속에 있던 농민 공동체를 회복하려는 것에 천착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농민 계급 출신인 예수가 행한 사역은 무엇인가? 여기에서 저자는 은폐된 저항과 공개적인 저항을 구분한다. 저자에 의하면, 예수는 정확히 공개적인 저항과 은폐된 저항의 경계선에 위치한다. 그리고 예수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힘을 불어넣어서 자신과 더불어 이 선교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도록 독려했다고 본다(독려 공동체, a companionship of empowerment). 저자에 의하면 예수의 선교는 치유를 함께 나누는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구체적으로 저자는 예수의 사역의 핵심은 공유된 물질적 자원(식사)과 공유된 정신적 자원(치유)의 결합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저자에 의하면, 무상의 치유와 개방된 식사는 상호 연관되는데, 한 편은 먹거리가 필요하고, 다른 한 편은 치유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저자는 먹는 일과 치유는 하나가 된다고 본다.

여기에서 저자는 그렇다면 예수와 견유학파의 메시지가 동일하지 않은가를 묻는다. 저자에 의하면, 견유학파와 예수의 공통점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자신의 입장을 대변했다는 것이다. 또한 자신들의 복장을 통해서 그들의 메시지를 극적으로 상징화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특징적인 공통점은 양자가 모두 1세기의 물질주의, 억압, 그리고 1세기에 실질적인 힘을 창출해낸 것에 대한 왜곡된 의식에 대립하여 가르치고 행동했다는 점이다. 저자에 의하면 그렇다고 해서 양자가 서로 동일한 것은 아니다. 양자의 차이점은, 견유철학자들은 도시인이었던 반면, 예수는 시골 사람이었고, 견유철학자들은 자급자족의 개인주의 철학을 따랐던 반면, 예수는 공동체 운동을 조직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저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간 해석을 시도한다. 저자는 예수의 선교 운동에서 선교사들을 파송하는 구절을 주목한다: “… 일꾼이 자기 삯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 저자는 이것을 개방된 밥상의 먹을 것으로부터 수고에 대한 지불 방식의 먹을 것으로 이동이 문제가 된다고 본다. 저자에 의하면, 개방된 밥상은 오히려 민중적 차원에서 농민 공동체를 세우기 위한 전략이다. 그러므로 예수 운동의 발전 과정에서 음식을 나누는 것에서 마땅한 삯을 지불하는 것으로의 이동은 중요한 전환점이었다고 저자는 본다.

7장 누가, 왜 예수를 처형했는가?

저자는 일단 예수의 십자가형은 역사적 사실로 본다. 그리고 나서 저자는 십자가형이 고대에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고찰한다. 그는 마틴 헹엘(M. Hengel)의 연구결과를 수용하는데, 그것은 바로 십자가형은 고대에 널리 일반화되어 있었던 형벌이라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이 형벌은 반역자나 불순분자들에게 사용하는 처형방법이었다. 그러면 예수는 로마의 통치에 대한 공개적인 저항을 피했는데, 왜 예수는 십자가 처형을 당했는가? 일단 저자는 예수가 유월절 기간에 십자가에 처형되었다고 말하는 복음서 전승을 주목한다. 저자는 유월절의 의미를 다시 질문한다. 저자에 의하면, 외국의 식민지였던 당시 이스라엘로서는 유월절 축제가 로마에게는 매우 위험한 성격의 축제였다는 것이다(아켈라오의 3,000명 살해).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예수의 십자가 처형의 이유일 수 있는가? 저자는 예수가 예루살렘 입성후 성전난동 사건이 당시 유월절 축제 분위기에 미친 영향력을 말한다. 저자에 의하면 이것 때문에 예수가 체포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저자는 자신의 사회-경제적 관점에 따라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개방된 밥상과 무상의 치유에 대한 예수의 비전은, 종교와 정치의 배후세력으로서 교권을 형성하고 거간 역할을 하고 심지어는 억압구조를 만들어내는 근원이자 상징인 성전 안에서 그가 목도한 것고 심한 충돌을 일으켰습니다. … 성전파괴라는 예수의 상징적 행동은 그가 가르쳐왔던 것, 그가 치유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 그리고 그가 개방된 밥상의 실천 속에서 이루고자 했던 것을 강화시켰습니다.”

당연히 저자는 도전적인 질문을 받는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예수가 우리 죄를 구원하기 위해 죽었다고 주장하는 신학으로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저자는 역사, 신앙, 신학으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저자의 견해에 의하면, 예수가 빌라도 치하에서 십자가에 처형되어 죽었다. 이것이 바로 역사이다. 이러한 역사에 대해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십자가 처형 속에서 의미를 발견했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가 우리를 위해 죽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앙이다. 신학은 예수의 죽음이 인간의 죄를 대속한다는 개념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저자는 신앙은 역사 안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이러한 신앙을 종교적 전승의 언어로, 그리고 피의 희생 제사로 발전시키고 신학화 했다고 말한다.

8장 부활절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렇다면 저자는 예수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인가? 라는 질문을 받는다. 저자의 결론적 답변에 의하면, 부활절 이야기는 첫째, 단 하루 만에 일어난 사건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예수의 죽음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에 대한 오랜 기간 동안의 제자들의 고민을 반영한 것이다. 둘째, 부활한 예수가 여러 사람들에게 나타난 이야기는 사실 “환상”에 관한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의 지도력 싸움 때문에 생긴 문학적 창작들이다. 셋째, 부활은 예수가 그를 따랐던 사람들 및 친구들과 계속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여러 은유들 가운데 하나, 단지 하나일 따름이다.

그러면 다시금 저자는 질문을 받는다: “빈무덤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이에 관하여 저자는 빈무덤이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고 본다. 왜냐하면 복음서 저자들이 보도하는 내용에서 이미 일치되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이 사실에서 저자는 객관적 보도를 뛰어 넘는 복음서 저자들의 의도가 분명히 작용했다는 것을 읽어 낸다.

계발적으로 제기되는 질문을 저자는 또 다시 받는다: “그렇다면 확실한 역사적 사실이라 할 수 있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여기에서 저자는 외부 자료를 주목한다. 첫째는 요세푸스(Josephus)이고, 둘째는 타키투스(Tacitus)이다. 이 두 가지 자료 안에서 저자는 공통점을 발견하는데, 그것은 바로 “식민지” 안에서 무언가 운동이 있었고, 그 창시자는 빌라도에 의해 처형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요세푸스와 타키투스는 예수와 연결된 이 운동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지속성”(unexpected continuity)이 있음을 증거한다는 것이다.

마침내 저자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는다: “도대체 저자 당신은 개인적으로 부활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당신은 부활신앙을 갖고 있기는 한가?” 저자는 답변하기를, “부활은 문자적으로, 몸이 무덤 밖으로 나온다든지, 혹은 빈무덤이나 환상, 혹은 그 어떤 것과도 상관없습니다. 그 모든 것들은 신앙을 표현하는 극적인 방법들입니다. 저에게 있어서 부활의 핵심은, 하느님의 능력이 이제 시공간적 제약을 받지 않는 예수를 통해 그를 믿고 경험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현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자는, 부활 현현에 관한 기사도 정치적으로 해석한다. 부활 현현 이야기들은 때 묻은 이야기라는 것이다. 저자에 의하면, 요한복음 20장을 읽노라면, 예수의 평등주의적 공동체로부터 집단지도체제(12 제자), 혹은 특수한 개인들(베드로나 사랑받는 제자)에게로 권위가 넘어가는 조짐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부활현현은 이러한 주도권 내지 권위 싸움을 위한 수단이 된다는 것이다. 저자에게 있어서 역사적인 사실은 십자가 처형 이전에 예수를 믿어왔던 사람들이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예수를 믿었다는 것이다. 어쨌든 예수의 개방된 밥상에 초대되었던 사람들은 예수의 비전과 계획을 계속 살아냈고, 그러한 비전과 계획 속에서 그의 현존을 경험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저자는 자신이 믿는 부활절이라고 한다.

9장 어떻게 우리는 예수로부터 그리스도에 이르게 되는가?

이 장에서 저자는 간단히 역사적 예수에 관한 자신의 연구결과를 요약한다: “예수는, 오랜 동안 그럭저럭 생존을 유지해오다가 점점 더 심하게 억압을 받게 된 한 피점령지의 농민들 사이에서 살았습니다. … 그는 대안이 될 만한 새로운 비전을 제시했고, 또한 그것을 삶으로써 살아 내었습니다. … 그 비전은 무상의 치유와 나눔의 식사가 있는 공동체, 하느님 앞과 서로의 앞에서 평등한 공동체이지요. … 이 새로운 공동체가 하느님 나라의 모습, 즉 시이저가 아니라 하느님이 이 세상을 직접 다스리시게 될 때의 전체 세계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예수의 모습으로부터 저자는 교회의 가르침인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진술을 설명한다. 예수 그리스도! 예수는 역사적 인물이고, 그리스도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신앙고백이다. 저자는 자신이 생각하는 기독교 신앙을 밝히며 질문과 답변의 과정을 마친다: “역사적 예수가 하느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신 분이라는 것에 대한 신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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