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의 실존인 설교와 선포의 내용인 예수 그리스도

 

칼 바르트, “Not und Verheißung der christlichen Verkündigung”(1922), “그리스도교적 선포의 필요와 약속”, 바르트 학회 공역, 『말씀과 신학. 칼 바르트 논문집 I』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5), 125-160.

 

바르트는 1922년 어느 강연에 초청을 받아 자신의 신학에 대한 소개를 부탁 받았으나, 그는 자신의 신학을 소개하기보다는 한 사람의 목사로서 <그리스도교적 선포의 필요와 약속>이 무엇인가를 힘주어 말한다. 바르트는 자신의 신학을 결코 새로운 신학이 아니라 단지 기존 신학적 견해에 대한 수정작업 정도라고 평가한다(125f).1 그래서 그는 자신이 초대받은 그 강연에서 자신의 신학적 관점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밝히는데, 바르트는 자신이 ‘바른 신학에 관심을 두고 있으며’(125), 자신의 신학은 “바르게 정초된 다른 신학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126)고 한다. 그렇다면 바르트가 말하는 바른 신학이란 무엇이며, 그의 신학적 관심은 무엇인가?

 

목사의 실존으로서 설교(선포)

바르트는 자신이 옛 신학과 새로운 신학에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그 질문이 바로 강연의 제목인 “그리스도교적 선포의 필요와 약속”이다(128). 바르트는 한 사람의 목사로서 실존(삶)과 성서 사이에서 바른 길을 고민했다고 말한다: “한쪽에는 인간의 삶의 문제와 다른 한쪽에는 성서의 내용 사이에서 나는 바른 길을 찾으려고 노력했다”(128). 이것이 바로 그가 주장하는 바른 신학이며 목사가 고민해야 하는 문제이다. 목사는 성서에 대해 계속해서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128).2아마도 바르트가 초청받은 그 강연은 목사들이 모인 자리였던 것 같다. 당시 바르트는 이미 12 년간 목회하였다(128).[/note] 바르트에 따르면 이것이 바로 ‘목사의 실존’이다(130f.). 그러면 목사는 무엇을 선포해야 하는가?

한 사람의 목사로서 바르트는 자신의 실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자신의 신학적 스승들의 노선이 해결책을 주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내가 아는 신학(=리츨 추종: 발제자 주)에서는 말하자면 전혀 어떤 역할도 하지 못했다”(130). 그래서 바르트는 성서에 천착했는데, 특히 로마서를 연구했다고 한다(130). 이 연구를 통해 바르트는 목사의 실존인 설교문제에 대한 하나의 통찰을 발견한다: “우리가 설교를 어떻게 만들까가 아니라, 오히려 어떻게 그것을 할 수 있는가이다. 거기에는 내가 그리로 향하여 인도를 받은 줄 알며, 인도하고 싶은 빛 자체는 아니라 해도 그 빛의 반사가 내포되어 있다”(131). 즉 바르트에 의하면 설교는 목사에게로 비추어온 빛을 반사하는 행위이다. 이것을 바르트는 자신의 신학이라고 하면서, 굳이 명명하자면 “수정의 신학”이라고 한다(131).3 그러므로 바르트에 의하면 설교의 내용과 방법은 “좋든 싫든(nolens volens) (성서의 사건과 회중의 삶의: 발제자 첨가) 모든 사건이 하나님으로부터 연유되도록 말해야 한다”(134)는 것이다. 이것이 바르트가 말하는 예배 때의 ‘하나님의 현존’이다. 즉 바르트에 의하면 모든 예배는 하나님의 현존에로 수렴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예배의 모든 상황은 이 하나님의 현존을 공적으로 증언하고 외처며 부르짖는다는 것이다’(134). 따라서 바르트는 예배의 시간을 카이로스의 시간 곧 종말론적 시간이라고 한다: “주일 아침 상황은 사전적 의미에서 보면 역사의 종국(endgeschichtlich), 즉 종말론적이다”(137). 선포의 내용이 하나님의 현존이라면, 하나님을 만나는 바로 그 상황은 우리로서는 종말론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르트에 따르면 목사는 하나님의 현존을 선포해야 하며, 이것이 목사의 선포의 내용이어야 한다. 그러면 선포의 구체적 내용 곧 하나님의 현존의 구체적 내용은 무엇인가?

바르트에 의하면 목사는 설령 회중이 당면한 문제가 각각 다르고, 가져오는 문제가 다르다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아래의 내용을 선포해야 한다.

“세계의 창조자이며 구원자요, 시작과 마침이며, 세상의 주인이기 때문에 세계를 정복하는 자, 오히려 그러한 분을 붙들려는 피와 눈물, 가장 깊은 절망과 가장 높은 희망, 즉 그 격정적 욕구는 말씀으로써 말하여질 수 있는 것으로서 심판 중에서 은혜를 약속하는 그 말씀이며, 죽음에서 생명이며, 이 세상에서 저 세상을 약속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욕구다”(136).

그러면 목사는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현존을 어디에서 포착하여 선포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보이는 말씀인 성서

바르트는 종교개혁이 가혹할만큼 “오직 성서만을” 개신교 목사들에게 남겨 주었다고 본다(141).4 그렇기 때문에 목사는 성서에 천착해야 한다. 바르트는 현실의 그 무엇도 목사가 성서에 집중하고 매달려야 함을 간과하거나 약화할 수 없음을 다음과 같이 힘주어 말한다: “성서의 하나님 말씀 선포는 역사적 현실의 대단한 압력으로 우리에게 지워져서 흔들어 벗어 버릴 수가 없다”(142).5 그러면 성서는 목사를 힘들고 어렵게만 하는가?

바르트는 단호히 아니라고 한다. 바르트에 의하면 성서는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성서는 새롭고 보다 큰 긴장에 차 있는 기대(Erwartung)를 또 다른 측면으로부터 교회의 상황으로 밀고 가기 때문”이라고 한다(143). 바르트에 의하면 성서가 낯선 것은 삶의 문제를 다루는 차원이 인간과는 다르기 때문이라고 하면서(143f.), 성서는 회중이 예배 때 가져온 인간적 문제를 뛰어 넘어 더욱 깊고 근원적인 답을 준다는 것이다(144). 성서가 다루는 문제는 절대 고독, 절재 죄, 절대 어둠이기 때문이다.6 그러면 성서가 다루는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인가? 바르트는 한마디로 성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다룬다고 한다(145).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규정”(145)으로서 신구약 성서 전체에 나타난다고 바르트는 본다.

그런데 여기서 바르트의 성서관의 독특하고 놀라운 점이 나온다. 그것은 바로 성서의 대답을 듣지 않고서는 질문할 수 없다는 것이다(146). 성서는 인간의 삶의 모든 질문을 하나님에 대한 질문으로 바꾸어 놓는데, 성서가 이미 그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서 안에서는 질문이 곧 대답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대답은 인간의 모든 질문에 대한 부정을 통한 긍정이다: “하나님은 긍정으로 충만해 있다”(147). 질문과 대답을 하나로 하실 수 있는 분은 바르트에 의하면 오직 주님만이다(147). 보다 자세하게는 성서에는 인간이 질문하는 존재가 아니라, 질문을 받은 존재이다(149). 성서가 제시하고 있는 것은 이미 인간의 질문을 포괄하고 있다: “성서 속에서 질문하는 것들은 우리의 삶, 우리의 관심사, 우리의 욕망, 우리의 소원이 아니라, 그것은 주님께서 그분의 포도원에 일꾼을 찾는 것과 같다”(148). 바르트에 의하면 목사는 이러한 하나님을 향해 질문하는 사람이자 동시에 하나님에 의해 질문 받은 사람의 최정점에 서 있다(149). 그러므로 바르트는 목사가 하나님의 대답을 기다리는 자로서 성서를 해석하고 설교한다면 의미가 있다고 본다.

 

그리스도교의 긍정적 선포(부활)

바르트에 의하면 목사는 회중과 성서 사이에 있는 상황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때 그리스도교적 선포가 가능하다고 본다(150). 바르트에 의하면 회중과 성서 사이에 있는 상황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성서의 대답 곧 약속에 더욱 굳게 매달리는 것이다: “…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것을 신뢰하고 그리고 그것에 복종하게 되는 것 외에 다른 것일 수 없다 … 그것은 그리스도교적 선포의 약속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는 것이다”(150).

여기에서 바르트는 목사의 상황을 변증법적으로 제시한다. 즉 목사는 회중과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이다. 그러나 목사가 중보자가 될 수 있는가? 목사는 성서의 약속을 선포할 수 있는가? 바르트에 의하면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하다(152ff.). 그러나 바르트는 단호하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에게 가능하지 못한 것이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가능하기 때문에 우리는 목사로서 그리고 교회의 상황 안에서 구원을 받는다”(152). 바르트는 “목사직 위에 내리는 (하나님의: 발제자 첨가) 심판”(153) 때문에 목사가 그리스도교적 선포를 할 수 있다고 한다: “모든 육을 완전히 낮추고 죽기까지 복종하며 하나님의 질문을 받으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대답을 듣고 그런 다음 또한 인간들에게 그들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주는 목사라는 상황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153-54, cf. 155). 바르트에 의하면 이렇게 목사가 선포할 수 있게 되는 경우, 선포의 필요를 느끼게 되는 경우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질문 바로 한가운데 있을 때만 성립한다”고 한다(155). 그러면 목사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질문 한 가운데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이 바로 신학적으로는 십자가 신학이며 곧 종교개혁 신학이다. 이것이 바로 바르트가 자신의 신학이 바른 신학의 토대 위에 있다고 했는데, 그것은 영광의 신학에 대비되는 십자가 신학 곧 종교개혁의 신학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십자가 신학은 십자가에 달린 자의 포기와 그 이후에 가져온 약속을 말하는 신학이다: “십자가의 신학은 인간이 가장 고귀하다는 것과 가장 좋다고 여기는 바로 그것을 포기하고 그리고 심판 아래 세우므로 약속을 믿기 위해서 오직 믿음으로만 붙들게 되는 거기서부터 설계된다. 십자가에 달린자(der Gekreuzigte)인 그리스도가 그의 포기(derelictio) 속에서 바로 약속(부활: 발제자 주)을 가져오는 자이기 때문이다”(155-56).

바르트가 말하는 바른 신학이란 성서에서 질문함과 동시에 대답을 주며 다가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신학이다. 그 내용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데, 그는 십자가에 달린 자의 부활을 선포하는 것, 희망의 고백을 말하는 것(미 4:6)이다. 바르트는 강연 마지막에 오늘날도 종교개혁이 필요한가를 묻는다. 바르트는 종교개혁이 그 당시보다 오늘날 더욱 필요하다고 한다(159). 바르트는 자신의 강연에서 창조주 성령이여 오시옵소서(롬 8)라고 탄식하게 된다면, 자신의 신학을 제대로 소개받았을 것이라고 한다.

  1. 바르트는 새로운 신학적 관점을 제시한 것을 “순례의 신학”(127)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그는 겸손하게 자신의 신학이 그런 정도는 아니고, 다만 신 학적 대가들의 각주나 양념 정도라고 한다. 자신의 신학이 무언가 공헌한 점이 있다면 여러 신학적 견해에 대한 수정 작업 정도일 것일 뿐이라고 한다(126).
  2. 아마도 바르트가 초청받은 그 강연은 목사들이 모인 자리였던 것 같다. 당시 바르트는 이미 12 년간 목회하였다(128).
  3. 바로 이것 때문에 바르트는 자신의 신학이 하나의 새로운 신학적 창안이 아니라고 한다. 엄밀히 말하 면 바르트의 신학은 ‘하나님의 조명을 반사하는 신학’이다. ‘수정의 신학’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바 르트의 신학이 결과적으로는 당시 주류를 이루던 종교사학파와 리츨주의의 관점에 대하여 수정을 가했기 때문이다.
  4. 바르트는 가톨릭 미사에서 아쉬운 점은 개신교보다 성서에 비중을 두지 않는 점을 든다(140). 그렇다 면 개신교는 가톨릭보다 더 나은가? 그렇지는 않다. 바르트에 의하면 종교개혁이 미사 대신에 말씀 선포를 중시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말씀 선포는 여전히 성례전으로서 우리에게 남아있다(141).
  5. 비록 이것이 종교개혁의 음울한 그림자라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142).
  6. 바르트는 성서가 다루는 문제를 설명하면서, 욥의 문제제기, 바울이 죄에 대하여 언급한 것, 요한문헌 이 말하는 어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예로 든다(144-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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