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 손성현 옮김, <도스토옙스키>

투르나이젠의 <도스토옙스키>를 읽었다. 마음에 밟히는 문장을 적어 본다. 괄호 안은 내가 쓴 거다. 

인간 쪽에서는 저쪽으로 넘어가는 다리가 놓일 수 없다는 것을! … 혹시 하나님 쪽에서라면 어떨까? 35

에로스의 마술이 더 강력한 마술 앞에 무릎을 꿇었다고나 할까? 62. 

(물론 여기서 에로스는 내용상 육체적 사랑이겠으나, 83쪽 인용과 관련해서 난 지혜 또는 존재에 대한 열정으로 보고 싶다. 하나님을 향해 에로스를 발휘해 달려가도록 세팅되었다고는 하나 35쪽 인용과 관련해 볼 때 실패!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이 제시하는 마지막 너머의 마지막 한마디는 부활이다. 온 인류가 어두운 낭떠러지 아래서 허우적대고 있지만 그 위로 위대한 용서의 빛이 비쳐온다. 80

인간은 결국 하나님을 향하도록 지어진 피조물이라는 사실이 인간 존재의 심오한 특징인데, 그 인간이 이 궁극적 관계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 또한 그에 못지않게 심오한 특징이다. 83 

(얼마 전 식사 후 커피 자리에서 자유의지 문제가 나왔다. 궁극적 관계를 받아들이지 않는 의지의 자유가 바로 그것이지 않을까? 자유의지가 타락한 게 아니라 자유의지 자체가 악하다. 이게 악이라면 사탄 따로 인간 따로는 말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역설적으로 뭐랄까 애시당초 하나님이 사람의 가치를 얼마나 높여 보는지도 모르겠다. 아직도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인격적이고 사랑의 관계 정도로 말하는 게 인간에 대한 최고 대우 아닌가!)

그 소녀(창녀 소냐) 우리 인생이 하나님으로 인해 병드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의 방식으로 굳세고 건강하게 버텨보려고 하기 때문이다. 84-85

그는 인간의 문화와 사회가 자랑스럽게 여기는 높은 성벽과 첨탑에서 바벨탑의 냄새를 맡는다. 86-87

인간은 자기가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95

그 모든 인간적인 것이 멈춰 선 자리에서 신적인 것이 시작된다. 101 

(맞는 말이다. 하지만 좀 더 직하게 정확히 말하자. 신적인 것이 시작해야 인간적인 것이 멈춘다. )

무엇이 악마인가? 인간-신이 아니라 참된 하나님, 저편의 하나님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그 하나님을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정신이 다름 아닌 악마다. 116

하나님께서 승리하식 거야! 이 대답 속에 용서가 있다. 그 용서는 그리스도를 배반한 교회에 대한 용서이기도 하다. 125

그(도스토옙스키)는 교회 없는 진공 상태로 치고 나가기를 시도하기보다 교회의 문제를 붙잡고 씨름하는 편을 선택했다. 141 

(칸트의 비유. 비둘기가 하늘 날다가 공기 저항 없으면 더 좋을 텐데 라는 비유)

그러나 (톨스토이와 비교하여) 도스토옙스키는 다르다. 치열한 몸부림은 있다. 하지만 지나치게 안간힘을 쓰지는 않는다. 146  

그러나 도스토옙스키가 그려낸 어린이들의 모습을 보면 어른들보다 뛰어난 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무방비 상태로 인생 앞에 서는 것이다. 150-151